정유 공정 판 바꾼다…정유 공정 탄소배출 37% 줄일 기술 개발
고동연 카이스트 교수팀, 상온에서 원유 거르는 차세대 분리막 개발
- 나연준 기자
(서울=뉴스1) 나연준 기자 = 국내 연구진이 '끓여서 나누는' 정유 공정의 상식을 뒤엎는 상온에서 원유를 걸러내는 차세대 분리막 기술을 개발했다. 기존 '증류' 공정 대비 에너지,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고동연 한국과학기술원(KAIST) 생명화학공학과 교수 연구팀이 원유를 끓이지 않고 값싼 고분자 막만으로 상온에서 정밀하게 걸러내는 데 성공했다고 25일 밝혔다.
과기정통부 지원 사업으로 수행한 이번 연구 성과는 국제학술지 '네이처'에 게재됐다.
전 세계 정유 공장은 원유를 끓였다가 식히는 '증류' 방식에 의존해 왔다. 이 과정에서 소비되는 에너지는 연간 1100TWh(테라와트시)에 달하는데, 이는 1GW급 대형 원자력 발전소 약 130기가 1년 내내 쉬지 않고 생산해야 하는 규모다.
그동안 학계는 원유를 끓이지 않고 분리막으로 걸러내기 위한 연구에 주목해 왔다.
다만 분자 단위의 초정밀 분리를 구현하려면 분리막 표면에 머리카락 두께보다 훨씬 얇은 '선택층'(분리막에서 실제로 물질을 걸러내는 역할을 하는 핵심 기능층)을 반드시 코팅해야 한다는 것이 지배적 상식이었다. 하지만 선택층을 도입하면 제조 비용이 높아지고, 면적이 커질수록 코팅 결함이 생기기 쉬워 산업 규모로 확장하기 어려운 한계가 있었다.
연구팀은 이 상식을 완전히 뒤집고, 분리막에 아무런 코팅을 하지 않은 값싼 다공성 고분자(PAN) 막에 원유를 그대로 흘려보내는 파격적인 접근을 시도했다. 그 결과 원유 속의 무거운 기름 성분들이 분리막 내부의 미세한 구멍에 스스로 들러붙으며, 머리카락 굵기의 5만분의 1 크기인 2나노미터(nm) 이하의 정교한 미세 통로를 자발적으로 형성했다. 복합 혼합물인 원유가 분리막과 상호작용하며 스스로 맞춤형 '체'를 완성한 것이다.
이 체에 있는 통로를 통해 가벼운 나프타, 휘발유, 등유 성분만 빠르게 분리되었고 무거운 찌꺼기는 사실상 완전히 걸러졌다. 통상 분리막 표면에 기름 성분이 들러붙는 현상은 성능을 망치는 '오염'(파울링)으로 여겨져 왔지만, 연구팀은 이를 역으로 활용해 분리 통로를 만드는 도구로 전환시켰다. 이 방식은 기존에 보고된 최고 수준의 원유 분리막 대비 23배나 빠른 분리 속도를 기록했을 뿐만 아니라, 28일간 원유 분리를 지속해도 성능 저하가 없는 뛰어난 안정성을 입증했다.
이 기술은 막대한 설비 교체 비용 없이 기존 정유 공장의 배관 시스템에 필터 모듈을 추가하는 형태로 즉시 적용이 가능하다.
원유를 이 분리막에 통과시켜 나프타, 휘발유 등을 먼저 분리하고 남은 성분만 기존 증류탑에서 증류할 경우, 처음부터 증류하는 경우보다 에너지는 31.6%,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37.6%를 감축할 수 있으며 운영비 또한 36% 절감된다.
이를 국내 정유·석유화학 전반에 확대 적용하면 연간 약 1000만 톤의 온실가스를 감축할 수 있으며, 이는 승용차 400만 대가 1년 동안 내뿜는 탄소량과 비슷한 수준이다.
또한 원유 분리에 머무르지 않고 나프타·방향족 분리, 폐플라스틱 재활용, 배터리 소재·의약품 생산 공정 등 다양한 산업 분야로의 응용이 가능하며, 국산 분자 정유 플랫폼 기술로의 확장 가능성을 제시할 것으로 기대된다.
고동연 교수는 "산업이 고도화될수록 적은 에너지로 깨끗하게 나누는 기술의 가치는 더 커질 수밖에 없다"며 "우리가 매일 쓰는 거의 모든 물건의 출발점인 원유를, 끓이지 않고 거르는 방식으로 바꿀 수 있다면, 다가올 에너지 전환의 부담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yjra@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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