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주52시간' 한달…판교 게임밸리 '느긋해진 걸음'

"출퇴근시간 내가 정하고, 눈치 안보고 칼퇴근해요"

국내 주요게임사들이 몰려있는 경기도 성남시 판교 테크노밸리. ⓒ News1

(서울=뉴스1) 이수호 김위수 기자 = "오후 6시되면 눈치 안보고 칼퇴근해요."(대형 N게임사 개발자)

"놀금(매달 1회 금요일 휴가)이라는 제도가 생긴 이후로 기본근로시간이 주 30시간대로 확 줄었어요."(중견 K게임사 개발자)

1일 한국게임업계의 심장이라고 불리는 경기도 성남시 판교 일대에서 출근길에 만난 게임사 직원들에게 '주52시간제' 도입이후 달라진 일상에 대해 묻자 이같은 답변들이 돌아왔다.

게임업체들은 살인적인 야근으로 유명하다. 신작 출시일정을 맞추기 위해 야근과 특근을 밥먹듯 하다보니 사무실은 늘 불이 켜져있다고 해서 '오징어배' 혹은 '등대'에 빗대고 있다.

그랬던 게임사들의 근무환경이 한달 사이에 크게 바뀌었다고 한다. 출근길이나 게임업체 현장에서 만난 직원들은 대부분 "한달만에 생활이 확 바뀌었다"고 입을 모았다. 통상 오전 9시 출근시간을 준수할 필요가 없으니 출근길에 종종걸음을 하거나 뛰는 사람들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넥슨에서 근무중이 30대 개발자 K씨는 "7월부터 선택적 근로시간제가 시행되면서 사실 근무시간을 내가 조정할 수 있어서 너무 좋다"면서 "일이 없을 때는 오후 4시에 퇴근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인공지능(AI) 개발파트 소속인 K씨는 외국계 게임사에서 근무하다가 올초 넥슨으로 이직했다. 외국계 게임사에서 주 70시간 넘게 근무하다가 넥슨으로 이직하면서 근무시간이 주52시간으로 줄어들었다는 K씨는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아져서 좋다"면서 "진정한 워라벨을 누리고 있다"며 활짝 웃어보였다.

NHN엔터테인먼트에서 근무중인 30대 직원 B씨도 "월요일과 금요일은 오후 5시 이전에 퇴근해서 요가와 요리 등을 배우고 있다"면서 "과거에는 저녁약속이나 심지어 주말에도 외부미팅 등 업무를 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주52시간제가 시행되면서 이런 일이 거의 사라졌다"고 말했다.

넷마블과 엔씨소프트, 카카오게임즈, 스마일게이트, 블루홀 등 국내 게임사 대부분은 7월부터 장시간 근로를 금지하고 직원별로 출퇴근 시간을 자유롭게 설정하는 방식으로 근로문화를 바꿨다. 카카오게임즈는 월 1회 금요일에 무조건 쉬는 '놀금 제도'를 실시하고 있다.

중견게임업체 B사의 한 개발자는 "야근금지로 경영진들은 중국게임사들에게 속도경쟁에서 밀린다는 불안감이 있겠지만, 좋은인재가 빠져나가지 않는 효과도 분명 있을 것"이라며 "과거에는 중소게임사 개발자들이 해외게임사로 이직을 원했지만 최근에는 국내 대형게임사를 더 선호한다"고 말했다.

물론 모든 게임사 직원들이 이같은 혜택을 누리는 것은 아니다. 300명 미만의 게임업체들은 '주52시간제' 도입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형게임사들이 근로환경이 현저하게 달라지면서 이 여파는 자연스럽게 중소게임사로까지 미치고 있다.

직원이 100명 정도인 한 중소게임업체 개발자 C씨는 "업계가 전반적으로 변하고 있다보니, 중소개발사 직원들도 강제근무 등을 더이상 용납해서는 안된다는 공감대들이 형성되고 있다"고 말했다. 우수 개발자들이 대형업체로 이탈하는 것을 막기 위해 중소업체들도 근로여건을 개선할 공산이 커 보인다.

다만 정부 의도대로 주52시간제가 채용확대로 이어지지는 않는 모습이다. 대부분의 게임사들은 주52시간제 도입이후 부족한 인력을 외부에서 채용하기보다 신작출시를 미루는 방법으로 대처하고 있다. 이 때문에 게임업계는 신작 가뭄에 시달리고 있고, 이 틈새를 중국게임들이 파고들고 있어, 국산게임의 설자리는 갈수록 좁아지고 있다.

업계 한 고위관계자는 "모바일게임 시장이 MMORPG로 재편되고 정부규제를 받지 않는 중국게임사들이 대거 진입하면서 신작을 출시해도 성공할 가능성이 낮아진 상황"이라며 "확실한 IP가 아니면 다작 출시가 현실적으로 어려워 주52시간제가 도입됐다 해도 무리하게 채용하긴 어렵다"고 토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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