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성북이 달라졌다… 외국인 찾는 '예술·사찰 코스'로 뜬다
간송에서 한국미술을 듣고, 길상사에서 단풍·차담까지
예술관광 아트 인 서울에 33개국 114명 참여
- 윤슬빈 관광전문기자
(서울=뉴스1) 윤슬빈 관광전문기자 = 홍대·성수·명동처럼 잘 알려진 동네가 아닌데도 서울 성북을 찾는 외국인이 꾸준히 늘고 있다. 언덕을 올라야 닿는 조용한 동네지만, 미술관·사찰·로컬 골목이 겹겹이 이어지며 '한국적인 결'을 보고 싶어 하는 외국인들의 발걸음이 자연스럽게 모이고 있다.
지난 18일 오후 서울 성북구 간송미술관 앞 언덕길에는 외국인 관광객들이 삼삼오오 모였다. 일부는 미술관 건물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고 또 다른 이들은 안내 직원의 설명을 들으며 일정 대열에 맞춰 움직였다.
평소에는 주민과 학생들이 오가는 조용한 생활 동선이지만, 이날 성북을 처음 방문한 외국인들의 다소 들뜬 표정과 말소리가 골목 분위기를 달리 보이게 했다.
20여명의 외국인은 서울관광재단이 올해 처음 시범 운영한 '2025 예술관광 아트 인 서울(ARTS IN SEOUL)'의 5개 코스 가운데 성북 코스(간송미술관·길상사)에 참여했다.
5개 코스는 성북(간송미술관·길상사), 남산(전통공연·국악당), 정동(근대건축·뮤지컬), 한남(리움미술관·베어브릭 페인팅), 삼청(도보 예술 투어)으로 구성됐다.
서울관광재단에 따르면 18일 기준 프로그램 전체 참가자는 33개국 114명으로 20·30대 비중이 85.1%, 여성 비중은 94.7%였다.
국적 비중은 프랑스(13.2%), 미국(8.8%), 베트남(7.0%), 말레이시아(6.1%), 중국(6.1%) 순이었다. 일부 코스는 공지 후 몇 시간 만에 정원이 채워졌고 성북 코스 역시 높은 신청률을 기록했다.
성북 코스를 선택한 이유로는 "서울의 숨은 동네를 보고 싶어서", "한국의 예술적 맥락을 이해하고 싶어서"가 다수를 차지했다.
첫 목적지는 '간송미술관'이었다.
참가자들은 언덕길을 따라 교육실로 이동했고, 책자를 확인하며 자리를 잡았다. 교육실에서는 전시장으로 바로 들어가지 않고 작품의 시대·수집 배경을 먼저 듣는 방식으로 관람이 시작됐다.
간송미술관은 1938년 간송 전형필이 설립한 한국 최초의 사립 근대미술관으로, 해외 반출 위험이 컸던 시기 국내 문화재를 사재로 수집해 지켜낸 장소다.
현재 진행 중인 기획전 '보화비장'(寶華秘藏)은 간송이 지켜낸 유물뿐 아니라 20세기 초 주요 컬렉터 7인의 소장품을 함께 선별해 공개하는 전시다.
전인건 간송미술관 관장은 "올해 해방 80주년을 맞아 컬렉션의 구조와 수집 기록을 정리해 보여주는 데 중점을 뒀다"고 설명했다.
이날 설명은 외국인을 위해 모두 영어로 진행됐다.
미술관 학예사는 "이 도장은 작가의 낙관이고, 아래 도장은 작품의 소장 이력"이라며 한국 서화 특유의 인장 체계를 소개했다.
참가자들은 책자와 화면을 번갈아 보며 내용을 따라갔고 한국인에게도 생소한 세부 설명이 포함되자 고개를 끄덕이거나, 사진을 찍는 모습도 보였다.
관람 중에는 작품 앞에서 자연스럽게 작은 무리가 생겼다. 김정희의 만년작인 '대팽고회' 앞에서는 글씨 획의 번짐을 확대해 확인하는 이들이 있었고 국보 '청자 모자원숭이형 연적' 앞에서는 책자 이미지와 실물을 번갈아 비교하는 장면이 이어졌다.
스페인 출신 산타올라야 엘로이나(37)는 "스페인에 살면서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다녀본 적이 없는데 한국에서 미술 모델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한국의 예술에 관심을 갖게 됐다"며 "이번 전시를 보는데 시대 상황에서 문화재를 개인이 지켜냈다는 이야기가 놀라웠다"고 말했다.
두 번째 목적지는 성북 깊숙한 곳에 자리한 길상사였다.
입구를 지나 경내로 들어서자, 막바지 단풍이 나무와 바닥을 뒤덮어 참가자들의 발걸음이 자연스럽게 느려졌다. 붉고 노란 낙엽이 층을 이루고 있어 참가자들은 이동을 멈추고 바닥과 법당 주변을 여러 각도로 찍었다.
길상사는 원래 서울 3대 요정 '대원각'이 있던 터다. 이후 고(故) 김영한(법명 길상화) 여사가 건물을 법정 스님에게 시주하며 사찰로 전환된 곳이다.
법정 스님이 실제로 머물던 공간과 사용했던 물품이 보관된 진영각은 참가자들이 가장 오래 머무른 장소였다. 나무 의자, 필기도구, 작은 문서함 등을 확인하며 "이게 실제 스님이 쓰던 것이냐"는 질문이 연달아 나왔다.
다음 순서는 단청 체험이었다. 참가자들은 아크릴 단청 패턴 판 위에 마카로 색을 채웠고 완성된 조각은 오븐에 구워 키링으로 제작됐다. 패턴을 채우는 동안 서로의 색 조합을 비교하거나 제작 과정을 촬영하는 장면이 이어졌다.
마지막 일정은 스님과의 차담이었다. "명상해도 잡념이 생길 때는?", "생각을 줄이는 법이 있느냐", "관계에서 미련을 정리하는 기준은?" 등 자리에 앉자마자 질문이 쏟아졌다.
스님은 통역을 통해 차례로 답했고 참가자들은 고개를 끄덕이거나 노트에 적었다. 대화가 이어지며 예정된 시간은 자연스럽게 늘어났다.
베트남 출신 응 레 민 안(30)은 "사찰을 보는 방식이 완전히 달라졌다"고 했고 캐나다 출신 카 호우 신(32)은 "스님과 직접 대화를 나눈 것은 한국에서 가장 특별한 경험 중 하나였다"고 말했다.
실제 길상사를 찾는 외국인 관광객도 늘고 있다. 길상사 관계자는 "전체 방문객 중에 외국인 비중이 최근 20~30%까지 늘었다"며 "방문객 숫자가 체감상 전년과 비교하면 100% 증가한 것 같다"고 했다.
seulbin@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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