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냉면·막국수에서 평화를 찾았죠"…'메밀순례단' 아시나요
[인터뷰] 박승흡 전태일재단 이사장 겸 한반도메밀순례단 단장
메밀로 본 한국형 미식관광과 평화의 길
- 윤슬빈 관광전문기자
(서울=뉴스1) 윤슬빈 관광전문기자 = 서울 변두리의 오래된 평양냉면, 동치미 국물에 말아낸 강원의 막국수, 제주 들녘에서 부친 빙떡까지…. 메밀이 이어온 맛의 궤적을 따라 걷는 사람들이 있다. 이름하여 '한반도 메밀순례단'.
수년간의 발걸음과 기록은 순례단의 단장인 박승흡 전태일재단 이사장이 책 '메밀 순례기'로 엮었다. 단순한 맛집 안내가 아니라 담백함으로 한국 미각을 일깨우고 평화를 이야기하는 순례의 기록이다.
박승흡 전태일재단 이사장은 최근 서울 종로구 전태일기념관에서 <뉴스1>과 만나 "메밀은 단맛보다 담백함, 감칠맛보다 균형을 말해주는 음식"이라며 "그 길을 함께 걷는 순례가 결국 우리의 미식과 관광, 평화까지 이어진다"고 말했다.
주말이면 10명 남짓 모여 차에 오른다. 하루에 세 집, 네 집을 돌며 막국수와 냉면, 전병을 조금씩 맛본다.
박승흡 이사장은 "그냥 먹고 오는 게 아니다"라며 "주인장이 들려주는 내력과 조리법을 듣고 함께 간 이들이 자기 경험을 풀어놓으며 의견을 나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때로는 비평을 하고 다른 지역 사례와 비교하며 조언을 주고받는다"며 "그 과정이 바로 순례의 의미"라고 설명했다.
단순한 미식 탐방이 아니라 장인과 손님, 동행자들이 함께 이야기를 엮어가는 일종의 '쌍방향 순례'라는 것이다.
이 여정을 함께하는 이는 100여 명. 시니어 세대가 주축이지만 30·40대 후배 활동가들도 합류해 사진과 글로 순례를 체계화했고 정치·학계·문화계 인사들까지 함께하며 작은 사회적 공동체의 성격을 띠고 있다.
강원도 철원에서 태어나 춘천에서 자란 박 이사장에게 메밀은 곧 삶의 풍경이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냉면과 막국수는 특별한 음식이 아니라 일상의 밥상이었다"며 "평북 출신 아버지 덕에 더더욱 메밀은 제 삶의 공기 같은 것이었지요"라고 회고했다.
이후 평양 옥류관과 연변 냉면집, 제주 중산간 메밀밭까지 발걸음을 넓히며 40년 넘게 메밀을 좇아왔다.
이번에 펴낸 '박승흡의 메밀 순례기'에는 서울 홍대와 경기도 용인, 강원 평창, 제주 서귀포까지 전국 24개 음식점의 기록이 담겼다.
많은 이들이 "그럼 어디가 제일 맛있었느냐"고 묻곤 하지만, 박 이사장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음식은 줄 세우기의 대상이 아니다"라며 "각자의 맥락과 이야기가 있어 순위를 매기려는 순간 그 음식이 가진 고유한 풍미와 삶의 조건을 놓치게 된다"고 말했다.
소설가 김훈은 신간 추천사를 통해 "박승흡은 냉면 맛을 좇는 식도락쟁이가 아니라, 메밀의 정신을 붙드는 전도사"라고 평했다. 김훈의 말처럼 그의 순례는 단순한 맛집 탐방이 아니라 메밀을 통해 삶의 태도와 평화를 이야기하는 과정이다.
박 이사장은 메밀을 두고 "짠맛이나 단맛이 아닌 여백과 담백함, 무미(無味)의 미(美)를 보여주는 음식"이라며 "메밀 음식이야말로 단맛 일변도로 흐른 한국 음식 문화 속에서 균형을 되찾게 하는 출입구"라고 강조했다.
이어 그는 "요즘은 모든 음식이 단맛에 지배당한다"며 "하지만 메밀은 꾸밈을 덜어내고 담백한 조화와 균형을 보여주며 '무미의 미', 맛없음의 맛을 통해서만 느낄 수 있는 평화가 있다"고 설명했다.
순례길에서 만난 메밀의 풍경은 지역마다 달랐다.
강원 평창 더덕말은 막국수의 메카로 꼽히고 영동 지역은 고성에서 삼척에 이르기까지 동치미 국물에 메밀면을 말아낸 냉면으로 유명하다.
반면, 영서 지역은 동치미 대신 자유롭게 비벼 먹는 막국수가 발달했다. 제주는 중산간 지대의 광활한 메밀밭이 관광자원이 되고 빙떡과 몸국 같은 토속 음식으로 이어졌다.
박 이사장은 "제주는 메밀을 민중의 삶 속에 깊이 뿌리내린 곳"이라며 "산모를 위해 빙떡을 해 먹고 몸국에는 메밀가루가 꼭 들어간다"고 말했다.
그는 또 "메밀은 구황작물로서 고려·조선 시대부터 백성을 먹여 살린 생명의 곡식이었다"며 "가뭄과 냉해에도 살아남고, 50일 만에 열매를 맺는 특성에 메밀을 우리의 역사와 함께해온 평화의 작물이라고 부른다"며 메밀에 담긴 긴 역사와 생명력을 짚었다.
박승흡 이사장은 메밀 순례가 단순한 미식 경험을 넘어 한국 관광에도 시사점을 던진다고 말한다.
그는 "미식은 단순히 맛의 문제가 아니다"며 "그 음식이 어디서, 어떤 역사와 토양 위에서 나왔는지를 함께 느끼는 것으로 지역마다 다른 떼루아가 있고 그걸 찾아가는 것이 미식관광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이어 "메밀은 한국적 미각을 가장 잘 드러내는 자원이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메밀 음식점과 메밀밭이 단순한 식도락의 대상이 아니라 지역 문화를 이해하는 창구이자 여행 동선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평양냉면, 막국수 한 그릇이 곧 여행의 목적지가 되는 셈이다.
메밀은 또한 남과 북을 잇는 음식이다. 평양 옥류관의 냉면에서부터 강원도의 동치미 막국수까지 분단을 넘어 모두가 즐겨온 동일한 음식문화다.
박 이사장은 "여름이면 남과 북, 해외 동포들까지 함께 냉면을 먹는다"며 "음식만은 분단되지 않았다는 게 메밀의 힘"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좋은 음식을 권하고 함께 나누는 순간,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게 된다"며 "메밀은 그 자체로 평화의 밥상이자 공존의 길"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 박승흡 전태일재단 이사장 약력
△1962년 강원도 철원 출생
△서울대학교 국어교육학과 졸업
△1999년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설립, 초대 소장·이사장
△2002~2004년 최저임금연대 집행위원장
△2002~2003년 국가인권위원회 차별금지법제정 추진위원
△2003년 매일노동뉴스 인수
△2008년 매일노동뉴스 회장 취임
△2025년 2월~ 전태일재단 제13대 이사장 취임
△저서 '박승흡의 메밀 순례기'(2025)
seulbin@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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