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돈 제시·지역 불문" 원유 확보 총력전…정유사 피 마른다

종전 불발에 시장 불안감 증폭…"수익성보다 물량 확보 중요"
정부 '자원 안보' 경계 격상…'비축유 스와프' 등 가용 수단 총동원

29일(현지시간) 베네수엘라 푸에르토카베요 앞바다에 홍콩 국적의 원유 운반선 ‘시 호스’가 정박해 있다. 이 선박은 러시아산 디젤유를 쿠바로 운송 중이던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번 주 초 항로를 변경해 베네수엘라로 향했다.2026.03.29. ⓒ AFP=뉴스1

(서울=뉴스1) 원태성 기자

"지금은 특정 지역 원유를 가릴 처지가 아니다. 중동 외에 미국, 호주, 아프리카 등 어디든 물량만 있다면 웃돈을 주고서라도 가져와야 하는 상황이다."

중동 전쟁 장기화와 호르무즈 해협 봉쇄 리스크가 겹치며 중동산 원유 수급 불확실성이 급격히 커지자 국내 정유업계가 사실상 ‘비상 조달 체제’에 돌입했다. 종전 기대가 약화하면서 특정 지역을 가리지 않고 물량 확보 경쟁에 나서는 분위기다.

정부 역시 자원 안보 위기 경보를 '경계'로 격상하며 미국, UAE, 캐나다 등 대체 공급선 확보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하지만 글로벌 에너지 각자도생 국면 속에서 조달 여건은 녹록지 않은 상황이다. 다만 일각에서는 이번 위기를 성공적으로 극복할 경우 고질적인 중동 의존도를 낮추고 공급망 다변화를 완성하는 구조적 전환점을 맞이할 것이라는 기대감도 나온다.

지역·가격 따질 때 아니다…"물량 확보가 최우선" 정유업계 '피 마르는' 전쟁

6일 업계에 따르면 국내 정유사들은 한 달 넘게 이어진 호르무즈 해협 봉쇄 사태에 대응해 전 세계를 대상으로 원유 확보에 나서고 있다.

대한석유협회에 따르면 올해 1월 기준 국내 원유 도입의 70% 이상이 여전히 중동에 의존하고 있는 상황에서 수급 차질 우려가 현실화하자 조달 전략 자체를 바꾸고 있다.

정유사들이 물량 확보에 집중하는 이유는 미국-이란 전쟁이 장기화 조짐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이란에 대해 '2~3주 내 맹렬한 타격'을 예고하면서 단기간 내 종전 가능성은 힘들 전망이다. 시사했지만 시장의 불안감은 오히려 증폭되고 있기 때문이다.

전쟁의 양상이 확전으로 치달을 경우 4분기 국제 유가가 배럴당 치솟을 수 있다는 공포까지 확산되자 미국산 서부텍사스산원유(WTI)뿐만 아니라 아프리카174달러까지 와 아시아 등 전 세계 전 지역의 현물(Spot) 물량을 물색하고 있다.

다만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운임비 상승과 조달 비용 가중은 정유사의 원가 압박으로 이어질수 있다. 미국산 원유의 경우 계약 후 국내 도착까지 약 50일이 소요되는 등 물류 효율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정유사들은 공정 가동률 유지를 위해 '지역 불문' 수입에 나서고 있다.

시장에서는 '웃돈 경쟁'도 본격화된 것으로 보인다. 일부 물량은 기준 가격 대비 40% 이상 프리미엄이 붙은 사례도 등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 관계자는 "정제 설비가 중동산 중질유에 최적화되어 있지만 지금은 수익성을 따지기보다 생존을 위해 어떤 원유든 정제해 내야 하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정부 '자원 안보' 경계 격상…'비축유 스와프' 등 가용 수단 총동원

정부도 정유업계의 원유 확보 전쟁을 뒷받침하기 위해 지원책을 내놓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자원 안보 위기 경보를 '경계' 단계로 높이고 '비축유 스와프' 제도를 본격 가동했다. 이는 정유사가 대체 원유 선적을 확인하면 정부 비축유를 즉시 대여해주고 나중에 민간 물량이 도착하면 상환받는 방식이다. 이미 지난달 말 200만 배럴 규모의 첫 계약이 성사되었으며 향후 2000만 배럴까지 확대될 전망이다.

또한 한국석유공사는 해외 생산 자산을 국내로 끌어오는 '비상 도입 카드'를 꺼내 들었다.

호르무즈 해협을 거치지 않고 육상 파이프라인으로 우회 수출이 가능한 UAE 온쇼어 사업 물량과 수송비 문제로 그간 도입이 드물었던 캐나다 하베스트 생산분까지 국내 직공급을 추진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산 석유를 구입하라" 압박 수위를 높이는 상황에서 정부는 대미 무역수지 개선과 에너지 안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미국산 에너지 수입 비중을 전략적으로 늘린다는 방침이다.

31일 산업통상부는 정부세종청사에서 중동 상황과 관련한 에너지분야 공급망 현황 일일 브리핑을 갖고, 현재 원유 수급 상황과 비축유 스와프(SWAP) 제도 시행 방침을 알렸다. ⓒ 뉴스1 김초희 디자이너
'종전' 이후의 과제…중동 의존 탈피와 에너지 자립의 전환점

트럼프 대통령이 예고한 대로 전쟁이 조기에 종료되더라도 글로벌 에너지 질서는 이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전망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이미 미국의 해상 경비 역할 축소를 예고하며 안전 책임을 수입국들에 떠넘기고 있다. 심지어 이란의 해협 통행료 부과 문제까지 거론되는 등 중동산 원유 도입의 구조적 리스크는 상수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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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따라 업계 안팎에서는 이번 위기가 중동 중심의 원유 수급 구조를 북미·비중동으로 재편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미국산 원유 도입 확대는 단순한 수급 대응을 넘어 대미 무역 불균형 해소 카드로도 활용될 수 있는 만큼 전략적 선택지로 부상하고 있다.

실제 2016년 86%에 달했던 중동산 비중은 지난해 69%대까지 떨어졌으며 그 빈자리를 미국산(16.3%)이 빠르게 메우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이번 전쟁으로 인한 극한의 수급 위기를 견뎌낸다면 국내 정유업계는 전 세계 어디서든 원유를 끌어올 수 있는 진정한 의미4의 수입 다변화 역량을 갖추게 될 것"이라며 "단순한 위기 극복을 넘어 에너지 주권을 강화하는 것이 구조적 전환점으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khan@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