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려가 현실로" 쏟아진 하청 교섭 요청…기업들 '멘붕'
금속노조 1만명, 현대차·HD현대 등 16개 원청에 교섭 요구
“협력사 수천곳인데 어디서 올지 몰라”…대응 수위 '눈치 보기'
- 박기범 기자, 박기호 기자, 신현우 기자, 김진희 기자
(서울=뉴스1) 박기범 박기호 신현우 김진희 기자
"기준이 명확해야 하는데 모호한 것이 많다 보니 기업이 자체 판단을 할 수가 없습니다. 협력 업체가 수천 개가 될 텐데 언제, 어디에서 교섭 요청이 올지 모르다 보니 불안감이 커지는 상황입니다."
노동조합법 제2·3조 개정안(일명 노란봉투법) 시행 첫날인 10일 현대자동차와 HD현대중공업, 포스코 등 주요 대기업들을 상대로 하청 노조의 무더기 교섭 요청이 쏟아졌다.
기업들은 '우려가 현실이 됐다'며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특히 사용자 범위, 교섭 대상, 쟁의 행위 범위 등이 모호한 상태여서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지 혼란스러운 모습이다.
기업들은 대응을 최대한 자제하며 법에 따라 처리할 것이라는 원론적 입장을 보이고 있다. 동시에 타사의 동향을 살피는 등 '눈치 보기' 분위기도 감지된다.
이날 노란봉투법이 시행되자 노동계의 원청 기업을 상대로 한 교섭 요구가 잇따랐다. 우리나라 최대 산업별 노조인 민주노총 전국금속노조에 따르면 이날 오전 기준 사내하청·사내용역·자회사 등 147개 하청 사업장에 종사하는 조합원 1만 명이 실질적 지배·결정력을 행사해 온 16개 원청 기업에 교섭을 요청했다.
해당 원청 명단에는 현대자동차, 현대모비스, 현대글로비스, LX하우시스, 에코플라스틱, KCC글라스, 한국세큐리트, 한화오션, 현대삼호중공업, HD현대중공업, 한국지엠, SECO서진, 한국타이어, 한온시스템, SHB, 비엠아이 등이 포함됐다.
금속노조는 원청 교섭 요구 조합원 수를 지속적으로 늘려갈 방침이다. 앞서 노란봉투법 시행 이전부터 이 같은 움직임은 이어져 왔다. 한화오션 협력사 직원들은 지난달 25일부터 원청 교섭을 촉구하며 거제조선소 내 선각 삼거리에서 천막농성을 이어왔다.
시행 첫날인 만큼 기업들은 대응을 최대한 자제하며 상황을 지켜보는 모습이다.
실제로 일부 기업은 교섭 요청 사실을 확인하면서도 구체적인 대응 방안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이날 금속노조가 교섭을 요구했다고 밝힌 16개 기업 상당수는 교섭 요청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구체적인 교섭 의제나 대응 방향에 대해서는 함구했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구체적인 교섭 의제가 정해진 것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또 다른 제조기업 관계자는 "법과 시행령, 고용노동부 해석 지침에 따라 교섭에 임할 것"이라며 원론적 입장을 강조했다.
다른 기업의 대응을 살피는 눈치 보기 분위기도 감지된다. 불명확한 상황에서 먼저 대응에 나설 경우 자칫 향후 교섭의 기준이나 선례로 작용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한 기업 관계자는 "이제 시작 단계라 노사 관계 부서에서도 상당히 조심스러운 분위기"라며 "상황을 보면서 대응 방안을 검토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정도의 분위기"라고 전했다.
또 다른 업체 관계자도 "시행 첫날이다 보니 예민한 상황이라 어떤 말을 하는 것 자체가 조심스러운 분위기"라고 말했다.
업계에서도 원청 기업이 직접 교섭에 나서는 문제를 두고 당분간 상황을 지켜볼 가능성이 크다는 관측이 나온다. 업계 관계자는 "자회사나 협력사 노조가 원청 교섭을 요구하는 상황에서 회사가 바로 교섭에 나서는 것도 쉽지 않은 입장"이라며 "향후 상황을 지켜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재계에서는 법 적용 범위와 사용자 개념이 명확하지 않아 현장에서 혼란이 커질 수 있다고 우려한다.
한 재계 관계자는 "해석이 필요한 부분이 많다 보니 기준을 명확하게 제시해 줘야 하는데 기업이 자체적으로 판단하기가 어렵다"며 "기업이 자체 판단을 하더라도 결국 중앙노동위원회 판단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이어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기업 입장에서는 관리 비용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며 "특히 협력업체 수가 많은 산업일수록 부담이 더 클 것"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택배, 건설 등 다단계 하도급 구조가 일반적인 산업에서는 교섭 요구 대상이 어디까지 확대될지 예측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자동차, 조선 등 하청 의존도가 높은 제조 업계는 긴장감이 더욱 높다. 하청 기업의 교섭 요구가 동시다발적으로 이어질 수 있어서다. 또 다른 관계자는 "협력업체가 수천 개에 달하는 경우도 있는데 언제 어디에서 교섭 요청이 들어올지 알 수 없는 상황"이라며 "첫날부터 산업계 전반이 긴장 속에 상황을 지켜보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법 시행 초기인 만큼 원청 교섭을 둘러싼 노사 갈등이 실제 산업 현장에서 어떤 방식으로 전개될지 당분간 혼란이 이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pkb1@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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