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은 ‘AI 영토’ 넓히는데, 관료는 ‘낡은 울타리’[혁신의 창]

김현철 (사)한국인공지능협회 회장

(서울=뉴스1) 김현철 한국인공지능협회장 = 블랙록(BlackRock)과의 협약, 오픈에이아이(Open AI)의 샘 알트먼 방한, 그리고 APEC을 계기로 한 주요국 정상들과의 연쇄 회동까지. 최근 이재명 대통령은 글로벌 빅테크와 국제 리더십의 중심에서 ‘AI세일즈 외교’의 최전선에 서 있다. 대한민국 AI 산업의 운동장을 넓히고 기술 주권을 확보하려는 국가 원수의 광폭 행보는 고무적이다. 그러나 밖에서 불어오는 혁신의 바람이 정작 국내에 들어오면 ‘관치(官治)’라는 암초에 부딪힌다.

대통령의 성과가 무색하게도, 정부 일각에서는 20세기 개발연대 시절의 낡은 유물인 ‘법정단체’라는 그릇에 AI라는 거대한 문명을 가두려 하고 있다. 내년 1월 인공지능 기본법 시행령 발효를 앞두고 ‘법정단체 설립’이라는 중차대한 변화가 예고되었지만, 이에 대한 본질적인 문제 제기 없이 기묘한 침묵만이 흐르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인공지능 시대에 법정단체는 혁신의 허브가 아니라 병목일 뿐이다.

우리는 이미 뼈아픈 학습효과를 경험했다. 문재인 정부 시절,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이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AI”를 강조하자 정부는 관련 예산을 대폭 늘렸다. 돈은 흘렀으되 행정의 그릇은 그대로였다. 경직된 규정과 보여주기식 실적 관리 속에서 혁신 프로젝트들은 흩어졌고, 막대한 예산은 효율적인 성과로 이어지지 못했다. 그 비효율의 후폭풍이 바로 윤석열 정부의 ‘R&D 예산 대폭 삭감’이었다. 당시 삭감의 명분이 되었던 ‘나눠 먹기식 관행’은 사실 혁신을 담아내지 못한 낡은 행정 모델이 자초한 비극이었다. 이 사례를 반면교사 삼아야 하지만 경직된 형태의 법정단체 모델이 여전히 시행령에 들어가 있다.

문제는 AI가 과거의 제조업과 다르다는 점이다. 과거 산업정책 시절에는 특정 산업을 대표하는 단체에 힘을 실어주면 낙수효과가 발생했다. 하지만 AI는 특정 산업군이 아니라 모든 산업의 기반을 재편하는 문명의 운영체제(OS)다. 그 어떤 단일 기관도 이 광범위하고 역동적인 분야를 독점적으로 대표할 수 없다. 그럼에도 정부가 법에 특정 단체의 이름을 명시하는 순간, 생태계는 왜곡된다. 권한은 ‘공식 창구’에 쏠리고, 논의는 치열한 현장이 아닌 정치적 이해득실이 오가는 밀실로 숨어버리게 된다.

가장 우려스러운 것은 이 법정단체가 필연적으로 불러올 ‘관피아 카르텔’이다. 새로운 법정단체가 설립되면 그 자리는 으레 기술 트렌드와 무관한 퇴직 관료(OB)들이 채우게 된다. 그들이 지휘봉을 잡으면 정책은 스스로를 복제하고 정당화하는 방향으로 흐른다. 부처와 공공기관, 법정단체로 이어지는 인맥의 사슬이 공고해질수록, 현장에서 혁신을 만드는 개발자와 스타트업은 의사결정 구조에서 소외된다. 선출 권력은 임기가 끝나면 떠나지만, 관료주의는 구조로 남아 생태계를 지배한다. ‘야생성’과 ‘속도’가 생명인 AI 분야에 이러한 구조가 씌워지는 순간, 생태계 전체는 활력을 잃은 ‘동물원’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법정단체 모델이 과연 AI 시대에 맞는가?”라는 근원적 질문이다. AI 생태계는 위에서 내려오는 지시가 아니라, 아래에서부터 자생적으로 연결되고 분산되며 흐르는 강물과 같다. 한국인공지능협회 역시 정부가 지정해 세운 조직이 아니라, 기업과 개발자들이 필요에 의해 스스로 모여 만들어낸 흐름 그 자체다. 정부가 할 일은 흐르는 강을 더 넓고 깊게 만드는 것이지, 강 한가운데 톨게이트를 세워 통행료를 걷는 것이 아니다.

AI 기술은 몇 주 단위로 판도가 뒤집힌다. 정관을 고치고 총회를 열어야 움직이는 법정단체의 느린 시계로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다. 기업들이 기술력 강화보다 ‘법정단체 줄 대기’와 ‘서류 꾸미기’에 몰두하게 된다면 한국 AI의 미래는 없다. 간판만 번지르르한 ‘좀비 기업’만 양산될 뿐이다.

AI는 국가의 ‘간판’이 아니라 현장의 ‘축적’으로 완성된다. 국가는 옥상옥(屋上屋)의 관변 단체를 만들어 권한을 독점시킬 것이 아니라, 이미 자생적으로 형성된 민간 생태계를 존중하고 지원해야 한다. 대통령은 밖에서 AI 영토를 넓히고 있는데, 안에서 관료들이 과거의 실패를 답습하며 울타리를 치기 시작한다면, 우리는 세계와의 경쟁이 시작되기도 전에 스스로 길을 막는 꼴이 된다. 혁신의 시대, 국가는 흐름을 만들어야지 톨게이트가 되어서는 안 된다. 울타리가 아니라 흐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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