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곽 드러내는 금산분리 완화…K-반도체 '자금 병목' 풀리나
전영현·곽노정 "개별 기업, 대규모 투자 감당 어렵다" 한목소리
이재명 "실질적 대책 거의 마련 돼"…韓, AI 국가대항전 가세
- 최동현 기자, 심서현 기자
(서울=뉴스1) 최동현 심서현 기자
"금산분리를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실질적 대책 마련이 거의 다 된 것 같다."(이재명 대통령)
곽노정 SK하이닉스 대표이사 사장이 10일 "대규모 자금 확보가 저희만으로는 어려움이 있다"며 과감한 규제 완화를 요청하자, 이재명 대통령이 금산분리 규제를 언급하며 "어쩌면 산업 발전에 저해가 되는 요소"라고 호응했다. 반도체 등 첨단전략산업에 대한 '금산분리 규제 완화'가 수면 위로 본격 부상하는 분위기다.
곽노정 사장은 이날 용산 대통령실에서 열린 '인공지능(AI) 시대의 K-반도체 비전과 육성 전략 보고회'에서 "초대형 투자를 하나의 기업이 단독으로 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움이 많고, 특히나 대규모 자금 확보가 저희 힘만으로는 좀 어려운 부분이 있다"며 "투자 활성화를 위한 규제 완화가 뒷받침된다면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곽 사장의 발언은 AI 메모리 수요의 폭발적 증가에 따른 설비투자(CAPEX) 계획을 설명하는 맥락에서 나왔다. SK하이닉스는 용인 반도체 일반산단 클러스터에 총 600조 원을 투입해 팹(fab) 4기를 조성할 계획인데, 민간기업 자력만으로는 천문학적 투자를 감당하기 버겁다는 것이다.
곽 사장은 완화가 필요한 규제를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않았지만, 이 대통령이 곧바로 '금산분리 규제'를 언급하며 말을 받았다. 이 대통령은 "금산분리의 원칙은 독점의 폐해를 막기 위해서인데, 대규모 투자가 필요한 첨단 산업 분야는 그 문제를 이미 지나가 버린 문제고, 오히려 산업 발전에 저해가 되는 요소"라고 했다.
'K-반도체' 투톱인 삼성전자(005930)와 SK하이닉스(000660)는 국내는 물론 전 세계 D램 메모리 시장의 70%, 고대역폭메모리(HBM) 시장은 80%를 장악하는 독과점 기업이다. 이미 '독점 견제'의 프레임을 넘어, 한국 수출을 떠받치는 핵심 '성장 엔진'으로 자리 잡았다는 평가다. 두 기업이 앞으로도 글로벌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선 금산분리 규제가 되려 '족쇄'가 되고 있다는 게 이 대통령의 지적인 셈이다.
이 대통령이 '실질적 대책 마련'을 언급한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그는 "금산분리(규제의 취지를)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실질적인 대책을 마련하고 있는데, 거의 다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은 곽 사장에게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팹 가동에 필요한 전력 규모가 얼마인지 자세히 묻기도 했다.
시장은 이 대통령이 언급한 실질적 대책이 '금산분리 규제 한시적 완화'일 것으로 본다. 반도체·배터리 등은 이미 국내 시장에선 독점적 지위를 갖추고 있고, 천문학적인 투자가 수반되는 첨단전략산업에 한해 투자금 조달 숨통을 틔워줄 수 있는 특례를 적용하는 것이 골자다.
업계와 정부 등에 따르면 대통령실과 기획재정부, 산업통상자원부, 금융위원회, 공정거래위원회 등은 최근 지주회사 및 금산분리 규제를 일부 완화하는 방안을 물밑 협의 중이다. 첨단전략산업에 한해 지주회사 체제 내 손자회사의 자회사(증손회사) 지분 보유 요건을 현행 100%에서 50%로 낮춰주고, 해당 증손회사에 금융리스업을 허용하는 방안이 거론된다.
대기업의 기업형 벤처캐피털(CVC) 규제도 풀어 외부 출자 비중 한도는 40%에서 50%로 높이고 해외 투자 비중은 20%에서 30%로 확대하는 안도 테이블에 오른 것으로 전해진다. 다만 정부 관계자는 뉴스1과의 통화에서 "아직은 확정된 것은 없다"고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금산분리 규제 완화가 실현되면 SK하이닉스가 최대 수혜를 보게 된다. 지주사 체제에서 손자회사 구조로 반도체 사업을 영위하는 대기업은 SK하이닉스가 유일하다. 특히 SK하이닉스는 기존에 120조 원을 투자할 예정이던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투자 계획이 용적률 상향으로 다섯 배인 600조 원으로 급증해 투자금 조달 방안이 발등의 떨어진 불이었다.
특례가 적용되면 SK하이닉스는 금융리스업 자회사(증손회사)를 설립해 팹 투자금을 보다 수월하게 조달할 수 있게 된다. 예컨대 금융리스 자회사가 은행 대출, 회사채 발행 등을 통해 조달한 자금으로 공장을 짓고 장비를 매입하면, SK하이닉스는 임차료를 주고 공장과 장비를 빌려 쓰는 방안도 활용할 수 있다.
반도체 업계는 정부의 규제 완화 논의를 크게 반기고 있다. 한 업계 관계자는 "SK하이닉스로 한정하지 않더라도 반도체나 배터리는 대규모 투자금이 먼저 깔려야 하는 장치 산업"이라며 "(설비투자는) 당연히 기업의 현금 흐름이 우선 투입돼야 하겠지만, AI 수요가 전 세계적으로 급증하는 현재로선 개별 기업이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라고 말했다.
SK하이닉스에 비해 투자 체력이 높은 삼성전자도 수혜를 볼 것으로 예상된다. 전영현 삼성전자 디바이스솔루션(DS) 부문장(부회장)도 이날 보고회에서 "AI는 더 이상 기업 간 경쟁이 아닌 국가대항전 양상으로 변화하고 있다"면서 "반도체는 전통적으로 대규모 투자가 필요한 산업인데, 폭발적인 AI 수요 대응을 위해서 개별 기업이 감당하기엔 부담이 너무 커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 미국·일본 등 경쟁국은 정부가 반도체 기업의 최대주주로 직접 나서며 '쩐의 전쟁'을 벌이고 있다. 미국 상무부는 인텔 지분 9.9%를 인수해 최대주주로 등극했고, 일본 경제산업성은 자국 반도체 파운드리 연합 라피더스에 2조 9000억 엔(약 27조 원)의 공적 자금을 투입한 데 이어 현물 취득 방식으로 지분을 획득할 예정이다. 대만 TSMC의 최대주주는 대만 국가발전위원회(NDC)다.
정부도 질세라 이날 '반도체 세계 2강'을 목표로 한 반도체산업 육성전략을 발표하며 지원을 강화하기로 했다. 2047년까지 약 700조 원을 투자해 세계 최대·최고 수준의 반도체 클러스터(팹 10기)를 조성하고, 팹리스 산업 규모를 현재의 10배로 확대하며, 팹리스·파운드리 등 시스템반도체와 소재·부품·장비 생태계 경쟁력도 모두 끌어올린다는 구상이다.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은 "반도체 국가대항전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국가적 역량을 총결집해야 한다"면서 "우리가 잘하는 반도체 제조 분야는 기업의 투자를 전방위 지원해 세계 1위 초격차를 유지하고, 경쟁력이 부족한 시스템반도체, 특히 팹리스 분야는 파운드리-수요기업 등 온 생태계를 동원해 10배로 키우겠다"고 말했다.
dongchoi89@news1.kr
Copyright ⓒ 뉴스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이용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