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산주기 단축' 국회 통과…유통업계 '유동성 부담' 시험대

직매입 60→35일·특약매입 40→20일…업계 "운전자금 부담 불가피"
발주량 줄이고 검증 상품 집중 가능성…중소·신생업체 판로 위축 우려

11일 오전 서울 광진구 동서울우편물류센터에서 직원들이 택배 분류 작업으로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사진은 기사와 관련 없음). 2026.9.11 ⓒ 뉴스1 김진환 기자

(서울=뉴스1) 이철 기자 = 대형 유통업체의 직매입과 특약매입 상품 등의 대금 지급기한을 단축하는 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유통업계의 자금 운용에도 상당한 변화가 불가피할 전망이다.

납품업체의 대금을 보다 빨리 지급해 중소업체를 보호한다는 취지지만 유통업계에서는 정산주기가 짧아지는 만큼 운전자금 부담이 커질 수밖에 없다고 우려한다.

특히 자금 부담을 줄이기 위해 직매입 물량을 축소하거나 판매가 검증된 상품 위주로 발주할 경우 오히려 중소·신생 납품업체의 판로가 좁아지는 역효과가 나타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직매입 60→35일…유통업계 "1년 안에 자금운용 바꿔야"

17일 국회 본회의에서 대규모유통업법 개정안이 의결됨에 따라 해당 법안은 공포일로부터 1년 후 시행될 예정이다.

이번 개정안은 티몬·위메프 미정산 사태 등을 계기로 추진됐다. 유통업체의 자금 사정이 악화할 경우 납품업체까지 연쇄적인 자금난에 빠질 수 있는 만큼 대금 지급 시기를 앞당겨 중소업체를 보호하겠다는 취지다.

개정안이 시행되면 직매입 거래의 대금 지급기한은 상품 수령일 기준 현행 최대 60일에서 35일로 줄어든다.

특약매입·매장임대차·위수탁 거래의 대금 지급기한도 판매 마감일로부터 40일에서 20일로 단축된다.

공정거래위원회의 서면실태조사에 따르면 유통업체의 평균 대금 지급 소요기간은 직매입 27.8일, 특약매입 23.2일, 위수탁 21.3일, 임대을 20.4일이었다.

평균 지급기간은 직매입의 경우 새 기준인 35일보다 짧지만 업체별 편차는 상당하다.

조사 당시 직매입 평균 정산주기가 50일 이상인 업체는 6개, 40일 초과~50일 이하 업체는 13개였다. 30일 초과~40일 이하 업체도 21개에 달했다.

특약매입의 경우 평균 정산주기가 30일을 초과한 업체가 17개, 20일 초과~30일 이하 업체는 31개였다.

직매입 정산주기가 긴 업체로는 다이소(59.1일), 컬리(54.6일), 메가마트·M춘천점(54.5일), 쿠팡(52.3일), 전자랜드(52일), 홈플러스(46.2일), 홈플러스익스프레스(40.9일) 등이 조사됐다.

한 유통업체 관계자는 "법이 시행되면 따를 수밖에 없는 만큼 현재 35일을 넘어가는 상품의 정산주기를 앞당기기 위한 대응책을 마련하고 있다"고 말했다.

15일 서울 시내 대형마트에서 시민들이 장을 보고 있다. (사진은 기사와 관련 없음). 026.4.15 ⓒ 뉴스1 김민지 기자
판매 전 돈부터 나갈 수도…발주량 축소 가능성

업계가 가장 우려하는 부분은 운전자금 부담이다.

직매입은 유통업체가 납품업체로부터 상품을 직접 사들여 판매하는 방식으로 판매되지 않은 상품의 재고 부담도 유통업체가 떠안는다.

앞으로는 상품을 매입한 뒤 판매 여부와 관계없이 35일 이내에 납품대금을 지급해야 한다.

특히 재고 회전기간이 긴 상품의 경우 상품 판매를 통해 현금을 회수하기 전에 납품대금을 먼저 지급해야 하는 상황이 늘어날 수 있다. 기존과 같은 규모의 직매입을 유지하려면 그만큼 추가적인 운전자금을 확보해야 한다.

이에 따라 업계에서는 전체 직매입 규모나 한 번에 발주하는 물량을 줄이는 방식으로 대응할 가능성이 거론된다.

업계 관계자는 "지금까지는 물량을 한 번에 많이 매입하면 가격이 낮아지기 때문에 시간이 조금 지나더라도 팔릴 만한 상품은 대규모로 발주할 수 있었다"며 "정산기간이 짧아지면 유동성 상황을 고려해 전체적인 발주 규모를 줄일 수밖에 없는 업체들도 생길 것"이라고 말했다.

유통업체의 자금 조달 비용이 늘어날 가능성도 있다. 자체 현금만으로 단축된 정산주기를 감당하기 어려운 업체는 차입이나 다른 방식으로 운전자금을 확보해야 하기 때문이다.

3일 오전 서울 중구의 한 주차장에 쿠팡 배달 차량이 주차돼 있다. (사진은 기사와 관련 없음). 2025.6.3 ⓒ 뉴스1 김진환 기자
"잘 팔리는 상품부터"…중소·신생업체가 먼저 밀릴 수도

업계에서는 정산주기 단축이 역설적으로 중소·신생 납품업체에 불리하게 작용할 가능성도 우려하고 있다.

유통업체가 제한된 자금으로 직매입 상품을 선택해야 한다면 판매 속도가 빠르고 수요 예측이 쉬운 상품을 우선할 가능성이 높아서다.

대기업의 인기 제품이나 회전율이 높은 식품 등은 일정 수준의 판매량을 예상할 수 있는 반면 신생·중소업체 상품은 판매 이력이 부족하고 수요 예측도 상대적으로 어렵다.

이에 따라 유통업체가 중소업체 제품의 초도 발주량을 줄이거나 직매입 대신 재고 부담이 상대적으로 적은 다른 거래 형태를 선택할 가능성도 제기된다.

또 다른 유통업체 관계자는 "대기업 제품은 특별한 마케팅 없이도 일정한 판매가 이뤄지는 상품이 많다"며 "정산주기가 짧아지면 판매량이 안정된 상품 위주로 발주가 진행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이어 "e커머스는 그동안 다양한 신생·소규모 업체의 상품을 매입하고 기획전을 통해 소비자 반응을 확인해 왔다"며 "앞으로는 새로운 업체나 상품을 발굴할 때도 이전보다 보수적으로 접근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했다.

중소 납품업체를 보호하기 위해 마련한 제도가 오히려 안정적인 판매처를 확보한 대기업 제품에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는 게 업계의 주장이다.

한국플랫폼입점사업자협회도 정산주기를 20일로 단축했을 때 평균 74%의 업체만 생존하고 대형·중소업체 간 양극화 지수가 2.4배 증가한다는 연구 결과를 제시하며 급격한 정산주기 단축의 부작용을 지적한 바 있다.

협회는 "현장의 중소 납품업체들에는 당장의 지급기한 며칠 단축보다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발주 물량 확보가 생존의 핵심"이라고 주장했다.

유통업계는 법 시행까지 주어진 1년 동안 자금 운용과 발주 시스템을 재정비할 것으로 보인다.

업계에서는 정산주기 단축이라는 납품업체 보호 장치가 실제 현장에서 발주 축소나 신규 업체의 진입 장벽 상승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제도 시행 과정에서 유통업체의 자금 부담과 거래 구조 변화도 함께 살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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