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산家 맏형' 박용곤 명예회장 명동성당서 영결식
"두산 100년 전통 잇고, 새로운 100년 기틀 마련한 '큰어른'"
- 장은지 기자, 박동해 기자
(서울=뉴스1) 장은지 박동해 기자 = 지난 3일 타계한 박용곤 두산그룹 명예회장의 발인이 7일 오전 서울 연건동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엄수됐다. 박 명예회장의 장남 박정원 두산그룹 회장과 차남 박지원 두산중공업 회장, 동생인 박용성 전 두산 회장과 박용만 두산인프라코어 회장(대한상공회의소 회장) 등 가족들은 애통한 표정으로 고인의 마지막 모습을 눈에 담았다.
고인의 장손이자 박정원 회장의 아들인 박상수씨가 영정사진을 들었고, 두산 직원들이 관을 운구했다. 독실한 가톨릭 집안답게 작은 십자가도 곁을 함께 했다.
두산그룹 오너일가 외 재계 인사 중에는 사돈인 구자열 LS그룹 회장이 참석해 운구차가 장례식장을 빠져나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봤다. 가족장으로 간소하게 장례를 치르기로 한 만큼, 다른 그룹처럼 계열사 사장단이 대거 참석하지는 않았다.
운구차는 고인이 평생을 헌신한 두산그룹 본사(동대문) 건물을 들러 명동성당으로 향했다. 두산가(家)는 이날 9시 명동성당에서 비공개 영결식을 갖고 고인과 마지막 이별을 했다. 장지는 경기 광주시 탄벌동 선영이다.
고인은 한국 재계에서 '침묵의 거인'으로 통했다. '지키지 못할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그는 상대의 말을 끝까지 경청한 뒤에야 자신의 뜻을 간결하게 전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생전 박 명예회장은 말을 많이 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말을 많이 하다 보면 쓸데없는 말을 하게 됩니다. 또 내 위치에서 무슨 말을 하면 그 말은 모두 약속이 되고 맙니다. 그러니 말을 줄여야죠"라고 했다. 가족의 화목을 늘 첫 손에 꼽았던 박 명예회장은 아내 사랑에서도 남달랐다. 1960년 부부의 연을 맺은 고(故) 이응숙 여사에게 평생 각별한 사랑을 쏟았다. 이 여사가 암 투병을 할 때는 병실 소파에서 쪽잠을 자며 간병을 했다. 두산 관계자에 따르면 1996년 이 여사가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나자 박 명예회장은 며칠간 식음을 전폐하기도 했다.
박 명예회장은 1932년 고(故) 박두병 두산그룹 초대회장의 6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51년 해군에 자원입대한 6·25 전쟁 참전 용사다. "남의 밑에 가서 남의 밥을 먹어야 노고의 귀중함을 안다"는 선친의 뜻에 따라 사회생활은 1960년 두산그룹이 아닌 한국산업은행 공채 6기로 시작했다. 1963년 동양맥주에 말단 사원으로 입사해서는 공장 청소와 맥주병 씻기부터 했다. 이후 한양식품 대표, 동양맥주 대표, 두산산업 대표 등을 거친 뒤 1981년 두산그룹 회장에 취임했다.
고인은 소비재 기업이었던 두산을 중공업 중심으로 혁신하는데 초석을 다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1996년 7월 할아버지인 고 박승직 창업주가 서울 종로에 '박승직상점'을 연 지 100년이 되는 기념일(8월 1일)을 앞두고 계열사 대표이사를 불러 중대 발표를 했다. "두산은 지속돼야 하지만, 가업(家業)이 중요한 게 아니다. 알짜 기업도 필요하면 팔 수 있다"는 그날의 선언은 두산의 대대적 체질개선의 신호탄이 됐다. 1대 박승직 창업주 시절 포목점에서 2대 박두병 회장 식음료 사업을 거쳐 3대에 두산을 중공업 기업으로 탈바꿈시킨 것이다.
이같은 선제조치에 힘입어 두산은 2000년대 한국중공업, 대우종합기계, 미국 밥캣 등을 인수하며 소비재 기업에서 산업재 중심의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다. 100년이 넘는 국내 최장수 기업의 이례적인 빠른 변신에 재계의 벤치마킹도 이어졌다. 재계는 "박 명예회장은 새로운 시도와 부단한 혁신을 통해 두산의 100년 전통을 이어갔고, 더 나아가 두산의 새로운 100년을 위한 기틀을 마련했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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