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들 가학적 청문회의 악몽…"왕회장의 28년전 답변보니"
[이슈터치]"글로벌기업 망신주기는 코리아디스카운트 망령"
- 최명용 기자
(서울=뉴스1) 최명용 기자 = "솔직히 말하면… 내라고 하니 내는 게 편안하게 산다는 생각으로 냈습니다."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1988년 12월 열린 일해재단 청문회에서 한 말이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일해재단을 만들어 기업들로부터 598억원을 거뒀다. 그때에도 전경련이 모금을 주도했고 전경련 회장을 맡았던 정주영 명예회장이 증인으로 채택됐다. 정 회장이 청문회에서 남긴 답변은 두고두고 화제가 됐다.
그로부터 28년이 지났다. '왕회장'에게 그룹경영을 물려받은 정몽구 회장을 비롯한 재계 총수들이 '대통령 모금 사건' 때문에 청문회에 서게 됐다. 그때나 지금이나 대통령이 내라고 해서 기업들이 돈을 모았다. 당시와 비슷하게 대기업 회장 9명이 증인으로 채택돼 국회의원 앞에 선다.
30년 동안 한국은 세계적으로 민주주의를 가장 발전시킨 나라로 꼽혔고 그 덕분에 외국인투자도 크게 늘었다. 한국 기업들은 소니와 GE, 토요타 GM 등을 제치거나 위협하며 글로벌기업으로 급성장했다. 휴대폰 반도체 TV 조선 분야 세계 1위 생산국, 자동차 세계 5위 국가로 발돋움했다.
30년전이 지났지만 비슷한 '재단'과 '모금'을 둘러싼 정치 부패스캔들이 글로벌기업으로 성장한 기업 대표들을 다시 청문회로 불러냈다. 한동안 잊혔던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망령을 다시 보는 듯하다. 외국인 투자자들은 어떤 눈으로 이 장면들을 볼 것인가.
서슬퍼렇던 5공 시절엔 권력자가 마음 먹기에 따라 그룹을 해체할 수 있었다. 1986년 해체된 국제그룹이 그 사례다. 그런 분위기에서 정주영 회장은 '편안하게 산다는 생각으로 (돈을) 냈다'고 했다. 기업들이 권력으로부터 받는 압박을 여실히 보여주는 현답이다.
대통령의 권력은 검찰과 경찰의 수사 지휘권, 국세청과 공정거래위원회의 기업 조사권은 물론 정부 부처의 각종 인허가권을 모두 지휘한다. 작은 규제 하나가 기업의 흥망에 결정적 영향을 주는 가운데 그 정점엔 대통령이 있다. 대통령이 내라고 하는 말의 무게는 남다르다.
SK와 CJ그룹의 인수합병(M&A)은 공정위의 반대로 황당하게 무산됐다. 이제 보니 대통령이 내려보낸 인사를 임원으로 발탁한 KT의 승리였다. 국민연금이 반대했다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도 무산됐을 것이다. 외국인투자자와 개인투자의 역할이 더 중요했지만 국민연금이 최소한 어깃장만 놓지 않은 것도 감지덕지다. 권력은 글로벌 기업을 더 키우는 데 도움을 주긴 어렵지만 권력은 치명적으로 기업을 방해할 수 있다.
국회는 이번 청문회에서 기업들이 낸 '돈'의 성격을 밝히려 한다. 그 답은 이미 28년 전에 '왕 회장'이 했다. 권력자의 요구를 거부했다가 그보다 수천배 불이익을 당할 게 뻔하다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모든 권력을 한 손에 쥔 제왕적 대통령에게 푼돈을 던져주는 게 싸게 먹힌다. 아무런 '현안'이 없던 LG그룹과 현대차그룹, 심지어 "여긴 왜 낸거야"할 정도인 아모레퍼시픽도 미르재단에 3억원을 낸 것도 그런 맥락이라고 봐야 한다.
기업들이 청문회를 앞두고 정작 걱정하는 것은 국회의원들의 질문도, 그들이 원하는 답변도 아니다. 질문하는 국회의원들도 "특정 대가를 얻을 목적으로 돈을 갖다 줬다"며 스스로 뇌물증여를 자백해줄 것을 기대하지 않을 것이다.
기업들은 딴 걱정이 크다. 생중계를 통해 노출될 회장들의 표정과 말솜씨, 태도 하나하나가 기업이미지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이다. 기업 회장들이 트럼프와 같은 달변가이거나 탤런트 기질이 있는 것도 아니다.
기업들은 국정조사를 대비해 각종 시나리오를 만들고 리허설을 반복하고 있다. 대답할 내용이 아니라 태도에 대한 연습이다. 회장들에게 '배우 역할'이 요구되고 있다. 허무맹랑한 질문에도 실소를 머금으면 안된다. 답변내용보다 발성, 표정, 태도가 더 관심사다.
좀처럼 전면에 등장하지 않는 마이크 울렁증 가진 80세 회장이 자칫 세계토픽이 될 수도 있다. 어눌한 말투와 발음, 표정 하나에서 자칫 놀림감이 될지 모른다. '말투가 어눌한 CEO가 만드는 자동차를 믿을 수 있겠나', '부도덕한 기업이 만드는 제품을 사겠는가' 글로벌 경쟁사들이 활용하기 좋은 마케팅 포인트다.
국정조사로 권력을 이용해 반칙한 기업이 있다면 밝혀 내야 한다. 잘잘못을 가려 이같은 일이 재발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하지만 호통 치고 망신 주고 분풀이하는 '자학적 청문회'는 아니다. 30년이 지나도 바뀌지 않은 것은 기업일까, 정치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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