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 최대 경상흑자에도 환율은 1500원대 약세…이유는[박선영의 경제 인사이트]
박선영 동국대 경제학과 교수
'1500원'이라는 환율 앞에서 가장 먼저 묻게 되는 것은 방향이 아니라 강도다. 왜 하필 원화가 이토록 크게 흔들리는가. 경상수지는 2025년 1230억 달러로 사상 최대 흑자를 냈고 코스피는 사상 처음 9000선을 넘었는데, 교과서가 약속한 통화 강세는 오지 않았다. 흑자가 강세를 부르지 않는 이 역설은 일시적 어긋남이 아니라 환율을 결정하는 힘 자체가 바뀌었다는 신호다.
한국은행이 최근 내놓은 두 편의 이슈노트('우리나라 대외부문의 구조적 변화가 환율에 미치는 영향'과 '해외투자와 투자소득이 환율에 미치는 영향')는 그 변화의 정체를 풀어낸다. 경상수지와 환율을 잇는 힘은 두 종류다. 자국 재화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는 '상품 충격'은 순수출을 키우며 원화를 끌어올린다. 흑자와 강세가 함께 가는, 우리에게 익숙한 세계다.
반면 거주자가 해외자산을 더 갖고 싶어 하는 '금융 충격'은 자본을 밖으로 밀어내며 통화를 떨어뜨린다. 약해진 원화가 순수출을 늘리는 가운데, 빠져나간 자본만큼의 경상흑자가 함께 나타난다. 흑자를 내는 일과 해외투자를 늘리는 일이 동전의 양면처럼 맞물리는, 흑자와 약세가 동행하는 낯선 세계다. 그리고 지금 한국은 분명히 후자에 들어와 있다. 2000년 이후 원·달러 실질환율 변동의 80% 이상이 금융 충격으로 설명되며, 2014년 순대외자산국으로 올라선 뒤로는 자본유출을 동반한 절하형 충격이 부쩍 잦아졌다.
대외부문의 무게중심이 옮겨갔기 때문이다. 우리 대외자산에서 중앙은행이 쥔 준비자산의 비중은 14.9%로 줄고, 민간의 증권투자가 44.1%까지 불어났다. 공공이 외환을 관리하던 시대에서 민간이 환율을 움직이는 시대로 넘어온 것이다. 더구나 그 투자는 한곳을 향한다. 우리 대외 주식투자의 67.7%가 미국으로 쏠려 있는데, 선진국 평균(29.5%)의 두 배를 넘는다. 분산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해외투자가 실은 달러 한 방향으로 집중되면서 시장 전체가 같은 베팅을 공유하는 구조가 만들어졌다.
이 위에서 환율을 미는 힘은 두 갈래다. 첫째는 거주자의 달러 선호, 곧 달러자산 수요 충격이다. 여기서 결정적인 변화는 자본유출의 성격이다. 과거의 유출이 위기 때 외국인이 한국을 등지고 떠나는 이탈이었다면, 지금의 유출은 국내 투자자가 더 나은 수익을 좇아 스스로 떠나는 선택이다. 그래서 과거에는 글로벌 공포가 커질 때만 환율이 튀었지만, 이제는 세계 금융시장이 평온해도 달러를 향한 자생적 수요가 환율을 밀어 올린다. 외부 충격이 아니라 내부 선호가 약세를 만드는, 질적으로 다른 국면이다.
둘째는 저축수요 충격이다. 고령화가 빨라지고 국내 투자가 식으면서 가계 저축은 늘었지만, 그 자금은 해외 인공지능(AI) 빅테크처럼 더 높은 수익을 약속하는 자산을 좇아 바다를 건넜다. 이 흐름은 환율을 단기에 흔드는 대신 수면 자체를 끌어올리는데, 2011년 말 이후 실질환율을 약 12% 높인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 경제의 인구구조와 성장 둔화가 환율의 바닥을 천천히 들어 올리고 있다는 뜻이다.
올해는 외국인마저 같은 방향에 가세했다. 코스피가 2배 넘게 뛰자 글로벌 펀드 안에서 한국과 반도체의 비중이 저절로 커졌고, 외국인은 정해진 비중을 맞추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기계적으로 팔아냈다. 연초 이후 누적 순매도가 100조 원을 넘었고, 그 대금이 달러로 바뀌어 빠져나가며 환율을 떠밀었다. 외국인이 팔아치운 금액이 쌓일수록 원화 가치는 그만큼 더 떨어졌다. 두 흐름의 상관계수는 -0.64로, 1에 가까울수록 둘이 빈틈없이 맞물려 움직였다는 뜻이니 외국인 매도와 원화 약세가 상당히 강하게 연동됐다는 얘기다. 증시가 최고가를 쓰는 그 순간에 환율도 함께 오르는 역설은 이렇게 빚어졌다. 위기의 매도가 아니라 강세장의 차익실현조차, 얕은 우리 시장에서는 원화를 끌어내리는 힘으로 돌아온 것이다.
한국은행의 국가 비교가 답을 준다. 동일한 자본유출 충격에 대한 환율 반응을 재면, 한국의 계수는 0.65로 미국(0.07)이나 일본(0.38)을 한참 웃돈다. 차이의 근원은 외환시장의 심도다. 거래의 두께가 얇은 시장에서는 같은 크기의 달러 수요가 가격을 훨씬 멀리 밀어낸다. 통화에도 위계가 있어, 위기 때 자금이 몰려드는 안전자산 통화와 가장 먼저 팔리는 위험자산 통화가 갈린다. 원화는 후자에 속하고, 그래서 거주자의 달러 수요가 빠르게 불어나는 동안 이를 받아낼 시장의 깊이가 따라가지 못하자 충격이 고스란히 가격으로 증폭됐다. 우리 펀더멘털이 유독 나빠서가 아니라, 원화라는 통화가 국제 금융시장에서 놓인 자리 때문이다.
한국은행 보고서는 이 자리가 어디로 향하는지 일본을 통해 보여준다. 일본은 상품수지가 적자여도 해외에서 벌어들인 투자소득으로 경상흑자를 떠받치는 '투자소득 국가'다. 한국의 거주자 해외 증권투자는 2025년 1403억 달러로 한 해 만에 2배가 됐고, 그 유출 흐름이 GDP의 7.5%에 이르러 일본(2.3%)마저 앞질렀다.
관건은 해외에서 번 돈이 국내로 돌아오느냐다. 현지에 쌓아두는 재투자 비중이 높을수록, 장부상 투자소득은 흑자여도 외환시장에는 달러가 풀리지 않는다. 반도체 공급망을 해외에 심는 우리 기업의 현지유보 성향이 짙어질수록 흑자가 환율을 떠받치는 힘은 그만큼 새 나간다. 일본이 먼저 걸어간 길을, 우리가 더 빠른 속도로 따라 밟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1500원은 위기의 경보라기보다 좌표의 이동에 가깝다. 무역으로 버는 나라에서 자본을 굴리는 나라로 넘어가는 전환의 한복판에서, 원화 약세의 상당 부분은 사건이 아니라 구조에서 온다. 처방이 두 겹이어야 하는 이유다. 눈앞의 수급 쏠림은 외환정책으로 다스리되, 그 아래에서는 시장의 깊이를 키워야 한다. 지난 4월 편입이 시작된 WGBI(세계국채지수)의 효과를 안착시키고, MSCI(모건스탠리캐피털인터내셔널) 선진국지수 편입으로 투자자 기반을 한층 넓히며, 해외 자회사가 번 돈이 배당으로 국내에 돌아오는 물길을 트는 일이 그 시작이다.
그러나 끝은 결국 체질이다. 자본이 굳이 바다를 건너는 이유는 단순하다. 오픈AI와 스페이스X, 앤스로픽처럼 압도적 성장을 약속하는 기업이 그쪽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처방도 분명하다. 우리도 그런 기업을 길러내 국내 투자수익률 자체를 끌어올리는 것이다. 돌아보면 2024년까지 우리의 화두는 저성장이었고, 코스피는 2025년 중반까지도 3000선 박스권에 갇혀 있었다.
지수가 마침내 그 천장을 뚫은 지금의 과제는, 그 상승이 우리 경제의 미래 성장성으로 뒷받침되도록 만드는 것이다. 올해의 사상 최대 경상흑자를 소비가 아니라 잠재성장률을 끌어올리는 투자로 흘려보내, 자본이 바다를 건너지 않아도 되는 나라를 만드는 일. 환율의 깊은 안정은 외환시장 안에서가 아니라 그 바깥의 우리 경제 안에서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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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박선영 동국대 경제학과 교수는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예일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은 거시·금융 경제학자다. 금융위원회, 금융감독원, 한국은행 등 주요 경제·금융 정책기관의 위원회와 자문기구에서 제도 설계와 정책 평가에 참여해 왔다. '경제 인사이트'에서는 학술 연구와 정책 실무 경험을 바탕으로, 숫자 이면에 놓인 경제의 논리를 독자에게 차분하고 명료하게 전달할 예정이다. 특히 환율·금리·자산시장부터 금융규제, 디지털 금융과 통화 질서에 이르기까지 주요 경제 이슈를 데이터와 이론에 근거해 분석하고, 정책 결정이 시장과 가계에 어떠한 경로로 전달되는지를 입체적으로 조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