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부할 수 없는 러브레터'로 기업 체질 개선…VIP운용의 '착한 행동주의'
저평가 기업 '디스카운트 요소' 걷어내 가치 제고…3배 오른 사례도
그린메일·소송 선 긋고 '윈윈' 강조…"기업·사회 변화에 역할하고파"
- 박승희 기자, 신건웅 기자
(서울=뉴스1) 박승희 신건웅 기자 = 국내 대표 가치투자 하우스인 VIP자산운용이 '우호적 행동주의'로 시장에서 존재감을 키우고 있다. 다른 행동주의 펀드가 대주주와 기업을 공격하며 압박한다면, VIP자산운용은 수십 쪽 분량의 맞춤형 제안서를 들고 찾아간다. 대주주와 소액주주가 '윈윈'(Win-win)하는 전략을 제시하는 것이 이들의 목표다.
김민국 VIP자산운용 대표는 지난 14일 서울 서초구 VIP운용 사무실에서 만난 자리에서 "폭력이어서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 아니라, 너무 매력적이라 안 하면 손해인 제안을 내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라며 "우리는 '너 왜 이것도 못 하느냐'가 아니라, 대주주와 소액주주 모두에게 유익한 설계를 권한다"고 말했다.
VIP운용의 행동주의는 요구와 압박보다 '설계'와 '컨설팅'에 가깝다. 김 대표는 기업에 건네는 제안서를 '연애편지'라고 비유했다. 그는 "우리 제안서는 기업에 전하는 수십 페이지의 연애편지와 같다"며 "수십 명의 직원이 붙어서 기업을 샅샅이 뜯어 보고, 전략을 고심해서 전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제안서에는 배당·자사주 정책 같은 주주환원뿐만 아니라 기업합병(M&A), 브랜드 전략, 공장입지, 재고 관리, 글로벌 생산기지 배치까지 전방위로 포함된다. 한 회사당 20~50페이지에 달하는 분석과 처방을 담아 회사가 '어떻게 하면 더 잘할 수 있는지'를 구조적으로 제안한다. 한 기업의 싱크탱크가 되어주는 셈이다.
VIP운용의 러브레터가 도착하는 회사들은 저평가된 기업들이 많다. 김 대표는 "지분율이 높더라도 저평가된 회사에 집중한다"고 말했다. 허름한 겉 포장을 제거하면 가려졌던 매력이 드러나는 상품처럼, 저평가된 기업의 구조를 바로잡아 본래 가치를 끌어내는 것이 '가치투자'의 묘미라는 것이다.
하지만 제안서를 받고 단번에 바뀌는 기업이 많지는 않다. 배당 확대나 자사주 소각처럼 주주가치와 직결되는 조치는 대주주의 세제 부담·지분율 희석 우려·상속 및 증여 계획 부담 등 '그들의 사정'이 얽혀 쉽게 결정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주주가치 제고와 대주주의 부담 완화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다고 설득하더라도, 실제 실행까지는 수년이 넘게 걸리기도 했다.
그럼에도 변화가 현실화한 사례가 있다. 김 대표는 메리츠금융지주를 대표적 예로 꼽았다. 그는 "메리츠에 대한 투자를 10년간 했다"며 "장기적인 신뢰를 바탕으로 그간 제안했던 것들이 하나씩 바뀌며 큰 보람을 느꼈다"고 했다. 메리츠금융지주는 조정호 회장이 2023년 '거꾸로 지배구조 개편'에 나서면서 주가가 폭발적으로 뛰었다. 2023년 4만 원 수준이던 주가는 12만 원대로 3배 올랐다.
당시 조 회장은 대주주 지분율이 50% 이하로 낮아지는 것을 감수하면서도 3개 상장사를 하나로 합쳤다. 승계를 포기해 회사가 '대주주의 사정'에 얽매이는 것을 막고, 그룹의 효율을 높이고 파이를 키워 주주가치 제고를 추진했다. 이에 메리츠금융은 '밸류업 모범생' 대표로 자리매김했다. 메리츠금융은 지난 3년에 이어 향후 3년간 당기순이익의 50%를 주주환원하겠다는 방침을 유지할 방침이다.
롯데렌탈은 VIP운용이 장기적으로 '문을 두드리고 있는' 또 다른 사례다. 회사는 2023년 자사주를 매입·소각하며 주주환원 강화 의지를 보였지만, 직후 대규모 유상증자를 발표해 논란이 불거졌다. 이 과정에서 기존 주주들의 지분은 희석됐고, 신주 발행가는 시장가보다 낮게 책정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VIP운용도 당시 당혹감을 느꼈다고 한다. 롯데렌탈은 지난해 9월 밸류업 공시를 통해 "주주가치 제고를 최우선시하는 주주중심 경영을 하겠다"고 밝혔지만, 5개월 만에 발행주식총수의 20%에 달하는 대규모 신주를 발행했다. 것이다. 김 대표는 "좋은 와인이 숙성될 거라고 믿고 들어갔는데 물을 탄 것이나 다름이 없다"고 지적했다.
다만 여전히 VIP운용은 롯데렌탈과의 대화에 임할 준비가 돼 있다. 인수 절차가 마무리되면 새 주인인 어피니티와 함께 새로운 변화에 대한 논의를 진행하기 위한 '러브콜'을 전할 계획이다. 김 대표는 "아쉬운 점이 있지만, 우리는 마음을 열고 지속해서 회사를 좀 더 설득할 것"이라며 "전체 주주를 위해 장기적으로 좋은 길이, 충분한 대안이 있을 것으로 본다"고 했다.
VIP운용의 우호적 행동주의가 더 많은 기업의 문을 열고, 한국 자본시장의 '밸류업' 흐름으로 확산할지 주목된다. 20여 년 전만 해도 대다수 기업이 VIP운용의 제안에 방어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최근에는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곳이 눈에 띄게 늘었다는 게 김 대표의 설명이다. 여러 기업에서 실현된 변화와 성과가 업계에 공유되며 '우호적 행동주의'의 효과가 알려진 영향으로 풀이된다.
김 대표는 설득을 통해 기업의 자발적 변화를 이끌어, 기업과 주주가 '윈윈'하는 시장을 만들겠단 포부를 거듭 강조했다. 그는 "그린메일·소송 같은 극단적인 방법을 찾기보단, 계속 문을 두드리며 우호적으로 대안을 찾는 게 우리의 방식"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저평가됐던 회사가 제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이를 통해 수익을 내는 것과 더불어 사회·투자 문화를 변화시킬 수 있도록 역할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seunghee@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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