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욜로은퇴 시즌3] '손주 돌봄'은 '무료'가 아니다
김경록 옵투스자산운용 고문
지인 중에 손주 돌보는 사람이 늘고 있다. 너무 행복하다고 하지만 자신의 자유로운 활동에 제약이 올 때도 있다. 이러한 제약에도 대부분 무료로 손주를 돌봐준다. 돈을 받지 않는다고 해서 비용이 없는 것은 아니다. 조부모가 손주를 돌보는 순간, 그 시간은 다른 용도로 사용할 수 없게 된다. 바로 경제학에서 말하는 기회비용이다.
손주를 돌보는 시간에도 가격은 있다. 가령 은퇴한 사람이 매주 20시간씩 손주를 돌본다고 하자. 그는 그 시간에 여행을 갈 수 있고, 운동을 할 수 있으며, 친구를 만날 수 있다. 재취업이나 강의, 자원봉사, 새로운 공부를 할 수도 있다. 손주를 돌보는 선택은 이 대안들을 포기하는 선택이기도 하다. 따라서 손주 돌봄의 비용은 가장 가치 있는 포기된 대안의 가치다. 꿈에 그리던 버킷 리스트(bucket list)를 포기했다면 손주 돌봄의 기회비용은 아주 큰 셈이다.
손주 돌봄에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자녀의 경력 단절을 막고, 맞벌이 가정의 소득을 유지하며, 손주와 조부모 사이의 정서적 유대를 강화한다. 다른 측면도 부각된다. 조부모의 은퇴 후 삶이 자녀의 노동시장과 사교육 일정에 맞춰 재편될 수 있다. 특히 한국에서는 등·하원, 식사, 병원, 학원 이동, 숙제 돌봄까지 연결된다. 한번 시작된 도움은 점점 정기적인 노동으로 변할 수 있다.
영국에서는 최근 보육비와 주거비 부담이 커지면서 조부모가 맞벌이 가정에서 손주를 돌보는 일이 늘고 있다. 상당수 영국 조부모가 정기적으로 손주를 돌보고 있으며, 일부는 자녀의 육아를 돕기 위해 이사하거나 조기 은퇴까지 선택하고 있다고 한다. 손주 돌봄이 조부모에게 신체·정서적 부담을 주고, '도와주고 싶어서' 시작한 일이 '거절하기 어려운 의무'로 변하는 현상도 논쟁이 되고 있다. 조부모가 무료 보육 인프라가 되는 셈이다. 여기에는 영국의 비싼 보육 시스템을 나이 든 부모가 무료 노동으로 그 빈틈을 메운다는 비판이 있다.
가족주의가 강하고 보육시스템이 미흡한 한국 사회에서는 조부모의 참여가 당연한 것처럼 돼 가고 있다. 당연하게 생각하지 말고 돌봄의 유형별로 다르게 대처할 필요가 있다.
우선, 지금 손주를 돌보는 일이 미래에 조부모가 나이 들었을 때 자녀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일종의 상호교환 또는 보험으로 인식하는 경우다. 이것은 가족 내에서 흔히 작동하는 암묵적 계약이다. 그러나 계약서가 없는 이 암묵적 계약이 잘 실현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노후만 더 의존적으로 만들 수 있다. 이런 관점으로 손주 돌봄을 시작하면 실망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노후를 준비하지 못하게 된다. 몸도 아프고 돈도 부족한 채 훌쩍 나이 들어버린 노후를 맞이할 수 있다.
둘째, 자발적으로 선택한 돌봄이다. 손주와 보내는 시간에서 얻는 행복은 분명히 가치가 있다. 손주의 성장에 참여하는 것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경험이다. 돈은 오가지 않지만 조부모는 정서적 만족을 얻고, 자녀는 보육비 절감과 노동시장 참여라는 편익을 얻는다. 그러나 사랑은 무제한 노동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신의 편익을 침해하는 요소도 반드시 있다. 이 경우 자녀의 효용과 자신의 효용을 모두 높일 수 있도록 시간 예산을 잘 짜야 한다. 돌봄에 투여되는 노동 시간을 사전에 잘 배분해야 한다는 뜻이다.
셋째, 공공 돌봄 시스템의 부족을 보충하는 돌봄이다. 공공 돌봄 시스템이 너무 비싸든지 혹은 서비스가 미덥지 못해 부득이 도와줘야 하는 경우다. 이 경우 많은 시간을 투입하다 보니 자신의 노후 준비가 미흡할 수 있다. 재취업, 자아실현, 건강에 배분되는 시간이 많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은퇴 후의 시간은 공짜가 아니다. 기회비용과 잠재 비용이 발생한다. 은퇴 후 시간은 인생에서 마지막으로 자유롭게 배분할 수 있는 가장 귀중한 자산이다. 따라서 돌봄에 투여되는 시간이 너무 많아서 자신의 노후 준비에 문제가 되면 합당한 비용을 청구해야 한다. 이렇게 해야 장기적으로 가족 전체의 시스템이 지속 가능하게 된다.
손주 돌봄은 주로 여성이 맡다 보니 돌봄에 따른 기회비용과 잠재 비용을 잘 계산하지 못한다. 현재의 좋은 선택을 희생하거나 미래의 질병을 감수해야 하는 비용이다. 손주 돌봄은 무료가 아니다. 편익뿐만 아니라 비용을 생각할 줄 알아야 가족 전체의 지속 가능성을 가능케 하는 합리적 선택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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