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에도 '20년 전 규제'…국책은행 경쟁력 갉아먹는 총액인건비의 덫

[손발 묶인 국책은행]②대통령도 "돈 있어도 못 준다" 지적
"민간과 경쟁하라면서 공무원식 규제"…금융공공기관 전반 개선 요구 확산

편집자주 ...글로벌 기술 패권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산업·수출입·기업은행 등 국책은행의 역할은 커지고 있다. AI와 반도체, 방산 등 국가 전략산업을 뒷받침할 정책금융의 중심에 있지만, 정작 국책은행은 20년 전 도입된 총인건비제와 경직된 인사·조직 규제에 묶여 민간 금융사와의 인재 경쟁에서 밀리고 있다. 여기에 지방 이전 논란까지 더해지며 우수 인력 이탈과 경쟁력 약화에 대한 우려도 커지고 있다. 뉴스1은 4회에 걸쳐 국책은행 경쟁력을 가로막는 구조적 문제를 진단하고, 정책금융 경쟁력 회복을 위한 제도 개선 방향을 짚어본다.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해 12월 19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별관에서 열린 금융위원회·공정거래위원회 업무보고에서 발언하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2025.12.19 ⓒ 뉴스1 허경 기자

(서울=뉴스1) 전준우 기자 = "총인건비 때문에 돈이 있어도 못 주는 산하 공공기관이 있는 것 같다."

지난해 12월 이재명 대통령이 금융위원회 업무보고에서 던진 이 한마디는 국책은행들이 20년 가까이 안고 있는 구조적 문제를 그대로 드러냈다. 정부는 인공지능(AI)과 반도체, 방산 등 국가 전략산업 육성을 위해 정책금융 확대를 주문하고 있지만, 정작 이를 수행하는 국책은행은 20년 전 만들어진 총인건비제에 묶여 임금과 인력 운영의 자율성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 2007년 1월 전면 시행된 총인건비 제도는 도입 당시만 해도 공직 사회의 자율성과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한 '대표적 혁신 제도'로 꼽혔다. 과거 행정안전부와 예산당국이 각 부처의 정원과 직급, 수당 기준을 일일이 통제하던 비효율을 깨고, '총액'만 관리하되 그 범위 내에서의 인력 운용과 수당 배분은 각 기관이 자율적으로 결정하도록 유도한다는 취지에서다. 지난 2005년 시범 도입된 뒤 2007년 공공기관 전반으로 확대됐다.

하지만 20년이 지난 현시점에서 이 제도는 시대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기형적 족쇄'로 전락했다. 기관별 비즈니스의 특성이나 수익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정부가 일방적으로 정한 가이드라인(정률 인상률)을 모든 기관에 똑같이 강제하기 때문이다.

특히 산업은행과 기업은행, 수출입은행은 일반 행정기관과 성격이 다르다. 정부 예산으로 운영되는 조직이 아니라 스스로 채권을 발행하고 금융 영업을 통해 수익을 내는 금융회사다. 매년 정부에 수천억 원의 배당까지 하지만, 임금과 성과급은 여전히 공공기관 기준에 맞춰 통제받고 있다.

금융권에서는 이를 두고 "돈은 민간처럼 벌고, 보수는 공무원처럼 묶여 있다"는 자조가 나온다.

이 같은 구조적 모순은 기업은행 시간외수당 사태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법원은 직원들에게 정당한 시간외수당을 지급해야 한다고 판단했지만, 기업은행은 총인건비 한도에 막혀 약 830억 원의 미지급 수당을 곧바로 지급하지 못했다.

이 대통령이 직접 문제 해결을 주문한 이후에도 상황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기업은행 노조는 올해 초 22일 동안 장민영 신임 행장의 출근을 저지하는 강경 투쟁을 벌였고, 노사가 가까스로 지급에 합의했다.

그러나 실제 직원들에게 밀린 수당이 지급되기까지 그 뒤로도 3개월이나 더 걸렸다. 감독당국인 금융위원회는 "총인건비 예외 적용을 받으려면 향후 유사 사례가 반복되지 않도록 자구책을 내놓으라"며 전제 조건을 달았다. 기업은행 경영진이 업무 효율화를 통해 고질적인 야근을 줄이고, 초과 근무로 쌓이는 보상 휴가를 실질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인력 운영 체계를 바꾸는 '임금 체불 재발 방지 방안'을 마련하고 나서야, 지난 5월 초 금융위의 최종 의결이 떨어졌다. 대통령의 지시가 있은 후에도 낡은 규제의 성벽을 넘는 데 반년 가까운 시간이 소모된 셈이다.

기업은행이 가까스로 총인건비의 예외 승인을 받아낸 이후 금융공공기관을 중심으로 "20년 된 총인건비 제도를 현실에 맞게 전면 수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봇물 터지듯 쏟아지고 있다.

국책은행들이 체감하는 위기의식은 더욱 크다. 이들 기관은 이제 단순히 정책자금을 공급하는 은행이 아니다. AI와 반도체, 바이오, 방산 등 첨단 전략산업은 물론 150조 원 규모의 국민성장펀드와 한미 조선협력(MASGA) 등 국가 핵심 프로젝트를 주도하는 '국가대표 투자은행(IB)'다.

하지만 사람을 붙잡을 수 있는 제도는 여전히 20년 전 수준에 머물러 있다.

한 국책은행 관계자는 "우리가 경쟁하는 상대는 국내 시중은행은 물론 글로벌 투자은행(IB)"이라며 "정부 정책사업은 가장 앞에서 책임지지만 성과에 대한 보상은커녕 시간외수당조차 제대로 지급하지 못하는 현실에 직원들의 박탈감이 상당하다"고 말했다.

총인건비제 논란은 국책은행만의 문제가 아니다.

최근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는 공공기관 경영평가에서 금융공공기관 가운데 유일하게 '미흡(D)' 등급을 받았다. 노조는 정부 승인 아래 하위직급 적체를 해소하기 위한 인사 운영을 추진했지만, 경영평가에서는 총인건비를 초과했다는 이유로 낮은 점수를 받았다고 반발하고 있다.

정부 승인을 받아 제도를 개선했지만, 같은 정부의 평가에서는 감점을 받는 모순이 발생한 것이다.

금융감독원 노동조합도 최근 노사협의회에서 총인건비 개선을 공식 안건으로 올렸다. 업무는 늘어나는데 보상 체계는 그대로인 만큼 더 이상 현 체계를 유지하기 어렵다는 주장이다. 이에 대해 이찬진 금감원장은 "금감원만의 문제가 아니고, 금융위원회 등 관계 부처와의 협의가 필요하다"며 중장기적인 검토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금융공공기관들은 총인건비제가 단순한 임금 문제가 아니라 국가 금융 경쟁력의 문제라고 입을 모은다.

민간 금융회사들은 희망퇴직과 성과 보상, AI 전문인력 채용 등을 통해 조직을 빠르게 바꾸고 있지만 국책은행은 임금과 채용, 조직 운영까지 정부 가이드라인에 묶여 있다는 것이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정부는 AI와 첨단산업 육성을 위해 정책금융의 역할을 강조하면서도 정작 이를 수행하는 기관에는 20년 전 만들어진 규제를 그대로 적용하고 있다"며 "기관마다 설립 목적과 수익 구조가 다른 만큼 최소한 금융공공기관에 대해서는 총인건비제 예외 적용이나 별도 운영 기준을 마련하는 등 제도 전반을 재검토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박상진 산업은행 회장(왼쪽 세 번째부터), 이억원 금융위원장,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 서정진 셀트리온그룹 회장 등 참석자들이 지난해 12월 11일 서울 여의도 산업은행 본점에서 열린 국민성장펀드 출범식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2025.12.11 ⓒ 뉴스1 김성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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