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장칼럼] 잔인한 금융과 공정한 금융

전준우 금융증권부 차장
전준우 금융증권부 차장

(서울=뉴스1) 전준우 기자 =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 당시, 정부는 벼랑 끝에 몰린 자영업자를 위해 연 1.5% 내외의 초저금리 긴급 대출을 단행했다.

당시 은행 지점들은 지원받으려는 자영업자로 연일 문전성시를 이뤘는데 현장에서 근무했던 한 은행원은 이렇게 회상했다. 일부 신청자들 사이에서 "피해 규모와 상관없이 무조건 받아야 한다"라거나, "버티다 보면 정부가 원금을 깎아줄 것"이라는 믿음이 확연했다고.

그 믿음은 현실이 됐다. 정부는 2023년 부실 우려가 있는 소상공인을 위해 원금을 감면해 주는 '새출발기금'을 출범시켰다. 새출발기금 상담을 담당했던 한 직원은 "서류상 재산이 한 푼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접수를 마친 신청자가 돌아가는 길에 고급 외제차에 올라타는 모습을 보고 씁쓸했던 기억이 있다"고 했다.

정부의 선한 금융 정책이 의도와 달리 악용된 그늘의 단면이다. 최근 감사원 감사 결과 새출발기금 수혜자 중 약 2000명은 변제능력이 있는데도 원금을 감면받은 것으로 조사됐다. 월 1억 원을 버는 고소득자도, 5억 원이 넘는 가상자산(코인) 보유자도, 신청 직전 재산을 가족에게 증여하는 등의 사해행위도 확인됐다.

이제 우려의 시선은 113만 명의 빚을 탕감해 주는 '새도약기금'으로 향한다. 7년 이상 연체된 5000만 원 이하의 채무를 정리해 주겠다는 취지지만, 시작부터 도덕적 해이(모럴 해저드)에 대한 경고음이 높다. 금융당국은 고소득자를 배제하고 가상자산 보유 현황까지 파악해 부작용을 막겠다고 하지만 '꼬리표' 없는 자금의 흐름을 정부가 통제하기엔 한계가 분명하다.

실제로 작년 한 해 신용점수 400점 미만의 최저 신용자들 사이에서 연체가 급증했다는 통계가 있다. 시장에는 어느덧 '빚을 제때 갚지 않아도 된다'는 잘못된 인식이 독버섯처럼 퍼지고 있는 건 아닌지 우려스러운 대목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해 금융권을 향해 "잔인한 금융", "피도 눈물도 없는 금융"이라는 모진 말과 함께 취약계층 대상 대출이 지나치게 고금리여서 빈익빈 부익부를 심화시키고 있다고 지적했다.

물론 서민금융을 세밀히 살피고 취약 계층을 보듬는 것은 국가의 책무다. 하지만 균형의 추가 한쪽으로 지나치게 기울어지면 시스템 자체가 흔들린다. 저신용자가 고신용자보다 더 낮은 금리로 돈을 빌릴 수 있고, 이미 밀린 빚을 조금만 더 버티면 '원금 상환' 조건에 충족하는데 누가 피땀 흘리며 열심히 빚을 갚겠는가.

진정한 선한 금융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매달 대출 원금과 이자를 꼬박꼬박 갚아 나가는 '성실 상환자'들이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지 않게 하는 것이다. 새해에는 묵묵히 책임을 다하는 이들을 응원하는, 보다 정교하고 공정한 금융 대책을 기대해 본다.

junoo5683@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