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가상자산 입법 '신중함'의 역설…산업은 기다리다 지쳤다

'안전장치'만 남긴 이용자보호법…'산업 설계도' 2단계법은 여전히 안갯속
넷플릭스 전철 밟을까…입법 '신중함'이 키운 산업 격차

ⓒ 뉴스1

(서울=뉴스1) 최재헌 기자

이달 중 발의만 되면 그걸로 만족해야 할 상황입니다. 지칠 지경입니다.

가상자산 2단계 입법을 기다리는 업계에선 체념 섞인 반응이 나온다. 설 연휴 전 법안 발의는 무산됐고, 일정이 다음 달로 넘어가는 것 아니냐는 우려까지 제기된다. 기다림은 길어지고, 불확실성은 고착화하고 있다.

정치권은 "추가 논의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반복하고 있다. 한정애 더불어민주당 정책위의장은 이달 발의를 목표로 다시 한번 일정을 제시했지만, 최근 가상자산 거래소 빗썸의 비트코인 오지급 사고 등 현안이 겹치며 논의가 늘어질 가능성도 있다.

문제는 이런 상황이 처음이 아니라는 점이다. 지난 2024년 7월 시행된 가상자산이용자보호법(이하 가상자산법)은 시세조종 금지, 예치금 보호 등 최소한의 이용자 보호 장치를 담았지만, 업권 전반을 규율하는 체계는 빠져 '반쪽짜리 법안'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가상자산 발행·유통·공시, 스테이블코인 등 산업의 뼈대를 다룰 내용은 모두 2단계 입법으로 넘겨졌다.

업계가 가상자산법 시행 때부터 "곧바로 2단계 입법을 논의해야 한다"고 요구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나 법 시행 이후 1년 7개월이 흐르도록 2단계 법안은 통합안 발의조차 못 한 채 공회전을 반복하고 있다.

2단계 입법은 단순한 보완 법안이 아니다. 가상자산법이 사고 방지를 위한 '안전장치'였다면, 2단계 법안은 산업의 구조와 방향을 규정한 '설계도'에 해당한다.

이 때문에 입법 지연을 단순한 행정 일정 문제로만 치부하기는 어렵다. 제도 공백은 곧 산업의 방향성과 경쟁력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국내 OTT 산업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규제 정비가 늦어지는 사이 글로벌 플랫폼인 넷플릭스는 빠르게 내수 시장을 선점했다. 한국은 콘텐츠 제작 역량은 갖췄지만, 플랫폼 주도권은 해외 기업에 내어줬다. '콘텐츠 강국'이라는 수식어와 달리, 수익과 시장 지배력은 외부에 의존하는 현실이 된 셈이다.

가상자산 산업 역시 다르지 않다. 제도 공백으로 기술과 자본, 인력은 해외로 빠져나가고 있다. 업비트와 코빗 등 거래소들이 합종연횡과 사업 확장을 모색하고 있지만, 법적 틀이 정비되지 않은 상황에선 투자와 실험에 제약이 따를 수밖에 없다. 특히 금융과 가상자산을 엄격히 분리한, 이른바 '금가분리' 원칙은 글로벌 흐름과 괴리를 키우고 있다.

해외 시장은 이미 다음 단계로 넘어가고 있다. 미국은 가상자산 상장지수펀드(ETF) 승인 이후 기관 참여가 확대되며, 거래소들이 결제·커스터디(수탁)·파생상품까지 아우르는 금융 인프라로 진화하고 있다. 유럽은 미카법(MiCA) 체계를 통해 규제를 명확히 했고, 싱가포르와 일본 역시 금융과 가상자산의 결합을 실험 중이다. 규제의 강도는 제각각이지만, 방향성만큼은 분명하다.

반면 한국은 아직 출발선에 서 있다. 2단계 입법이 지연되는 동안 시장은 '기다림'에 묶였고, 그 공백은 결국 해외 사업자들의 경쟁력 확대로 이어질 공산이 크다. 규제의 '신중함'이라는 변명 하에 산업이 성장하지 못하면, 그 신중함은 기회 상실로 귀결될 뿐이다.

입법은 미룰수록 신중해지는 것이 아니다. 불확실성만 길어질 뿐이다. 1년 7개월째 이어진 지연은 이미 산업을 보호하는 단계를 넘어 산업의 발목을 잡고 있다. 과거 플랫폼 주도권을 해외에 내줬던 전철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지금 필요한 것은 '검토'가 아니라 분명한 '선택'이다. 이미 충분히 기다렸다.

chsn12@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