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자산도 이제 '기관투자자' 주도…'코인 선진국' 경쟁서 뒤처진 韓
[선진 증시를 가다]④ 한국인이 창업한 하이퍼리즘, 일본·홍콩서 사업 확대
일본·홍콩·미국 모두 '법인 시장' 활성화…한국은 '그림의 떡'
- 박현영 블록체인전문기자
(서울=뉴스1) 박현영 블록체인전문기자 = 지난 10월 일본에선 '엔화 스테이블코인'이 현지 금융당국의 승인을 받고 공식 출시됐다. 지난해 6월 일본에서 시행된 개정 자금결제법에 따라 스테이블코인 관련 규제가 갖춰진 결과다.
보수적인 것으로 잘 알려진 일본 금융당국의 행보도 이러한데, 홍콩 같은 아시아 금융 허브는 더욱 진보적이다. 발행 규제는 촘촘하게 마련해뒀지만, 스테이블코인이 투기 수단이 아닌 '블록체인 기반 결제수단'임을 법에서 명확히 했다. 요건만 잘 갖추면 홍콩달러 연동 스테이블코인을 발행할 수 있도록 발행을 오히려 권장하는 기조이기도 하다. 아직 스테이블코인 규제가 갖춰지지 않은 우리나라와 대비된다.
법인 시장에서도 큰 차이가 있다. 국내에서는 올해 법인의 가상자산 투자가 단계적으로 허용될 예정이었으나, 현재 비영리법인의 가상자산 매도만 가능할뿐 상장사 및 전문투자자를 위한 투자 가이드라인 마련은 계속 지연되고 있다.
반면 일본, 홍콩 등은 법인, 즉 기관투자자들이 가상자산에 투자한 지 오래다. 미국은 단순히 투자하는 것을 넘어 기업이 비트코인을 보유하는 것이 '당연한' 상황이다.
오상록 하이퍼리즘 대표는 22일 뉴스1과 만나 "홍콩, 싱가포르처럼 규제 프레임워크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사업자는 안정감을 얻는다"라며 "한국은 규제 자체가 없어서 사업자 입장에선 계속 기다려야 하는 불안감이 있다 보니, 다른 국가에 거점을 두는 것이 당연해졌다"고 했다.
하이퍼리즘은 한국과 일본 두 국가에 모두 법인을 둔 가상자산 금융 서비스 기업이다. 가상자산 운용 사업과, 가상자산 프로젝트에 투자하는 벤처캐피탈(VC) 사업을 모두 영위하고 있다. 이전에는 한국에서 가상자산사업자(VASP) 신고까지 마치며 한국과 일본 두 시장에 모두 무게를 뒀지만 지금은 일본 내 펀드 운용 사업에 더 중점을 두고 있다. 규제 명확성이 있는 곳에서 사업을 할 수밖에 없다는 현실적 이유에서다.
그동안 가상자산 분야에선 한국이 일본보다 앞서 있다는 의견이 많았지만, 이는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 얘기다. 리테일(개인투자자) 거래량은 한국이 많으나 가상자산 시장 자체가 기관투자자들이 주도하는 시장이 됐기 때문이다. 기관투자자 거래에 있어 한국은 논외다.
하이퍼리즘 일본 법인을 이끄는 이원준 대표는 "일본에서는 법인이 개인과 동일하게 가상자산을 거래할 수 있고, 그 결과 메타플래닛을 비롯한 DAT(디지털자산 트레저리, 디지털자산을 꾸준히 매수하는 것) 기업들이 한국보다 먼저 등장했다"며 "특히 올해는 일본 법인 투자 생태계가 크게 발전했다"고 말했다.
이는 하이퍼리즘에도 긍정적인 결과로 돌아왔다. 올해 하이퍼리즘이 운용하는 엔화 펀드의 운용자산이 지난해 대비 3배 가량 성장한 것이다. 하이퍼리즘의 고객은 모두 기관투자자다.
이 대표는 "일본은 2~3년 내로 가상자산을 금융상품으로 편입시켜 현행 종합과세에서 분리과세로 세제를 개편하는 것이 확실시됐다"며 "전반적인 운용 생태계 성장에 추가 동력이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일본 내 스테이블코인 산업도 잠재력이 있을 것으로 봤다. 스테이블코인의 경우, 규모가 좀처럼 커지지 않았던 일본 리테일 시장에서도 효과를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이퍼리즘은 일본 최초 스테이블코인인 JPYC에 초기 투자를 한 바 있다.
이 대표는 "JPYC는 최근 계정 개설 1만건 및 누적 발행액 5억엔을 돌파했다"며 "1일 취득한도가 인당 100만엔이라 기업보다는 리테일 위주 거래가 이뤄지고 있는데, 보수적인 일본의 국민성을 감안한다면 충분히 의미 있는 성장이고, 한국 규제당국과 업계에서 참고로 삼을만 하다"고 설명했다.
이원준 대표가 일본 사업을 확장하는 동안 오상록 대표는 홍콩으로 거점을 옮겼다. 하이퍼리즘은 최근 홍콩에서 가상자산사업자 라이선스를 취득하는 것을 목표로 사업을 본격화했다.
오 대표는 "지식 산업은 제조업과 다르게 창업자들이 언제든 한국을 떠날 수 있다"면서 "앞으로는 창업자는 한국인이지만 주요 고객과 서비스는 해외에 있는 경우가 많이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홍콩을 거점으로 삼은 이유로는 아시아 금융 허브인 점과, 가상자산 관련 규제가 명확한 점을 꼽았다. 하이퍼리즘은 홍콩 가상자산사업(VA) △타입1(증권형 토큰 또는 유사한 가상자산 거래 사업) △타입4(증권형 토큰 관련 자문업) △타입9(자산관리업) 라이선스 조건에 맞춰 신고를 하고, 홍콩 내 사업을 확장한다는 방침이다.
홍콩 내 기관투자자들의 이해도가 높은 만큼, VC 사업보다도 기존 가상자산 운용 사업의 비중을 확대하기도 했다.
오 대표는 "규제가 명확하다는 특징도 있지만, 가상자산 기업들이 홍콩과 싱가포르로 가는 이유는 무엇보다 시장 자체가 크기 때문"이라며 "기관투자자 시장에 있어서는 규모도 훨씬 크고, 가상자산에 대한 투자자들의 이해도도 높다. 연기금, 공제회, 패밀리오피스 등 모든 기관이 가상자산에 대한 투자 지식을 깊게 갖췄다"고 강조했다.
법인 투자 시장이 하루 빨리 열리지 않으면, 한국과 다른 나라간 격차는 더 커질 것으로 전망하기도 했다.
오 대표는 "미국이나 홍콩에서는 기업에 '비트코인을 갖고 있느냐'고 질문하는 것이, '챗GPT를 쓰느냐'는 질문과 결이 비슷하다. 당연한 걸 질문한다는 의미"라며 "이제 해외에서는 비트코인 ETF(상장지수펀드)를 통해서든, 코인베이스 프라임(코인베이스의 기관 거래 서비스)을 통해서든 기업이 비트코인을 얼마든지 쉽게 살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에서 가상자산 사업을 시작하는 기업은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hyun1@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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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한국 증시는 경제 규모와 기업 경쟁력에 비해 늘 저평가돼 왔다. 개인은 투자보다 저축에 머물렀고, 증시는 투기와 불신의 대상이 됐다. 그사이 선진국은 달랐다. 일본은 '잃어버린 30년'속에서도 개인 투자를 제도권으로 끌어들였고 홍콩은 글로벌 자본의 허브로 경쟁력을 유지해왔다. 미국은 증시를 혁신 기업의 성장 통로이자 국민 자산 형성의 핵심 장치로 키웠다. 새 정부가 증시 활성화를 국정 과제로 내건 지금, 한국은 중대한 기로에 섰다. 혁신과 부의 선순환을 위해 자본시장은 어떻게 변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