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은행은 가상자산 사고파는데…韓 금융사는 '보관'도 못 해

SC, 글로벌 은행 최초 현물 거래 제공…기관 공략해 수익원 다각화
높은 신뢰 기반으로 OTC 시장 진출 가능성…"韓 규제 완화 필요"

스탠다드차타드(SC) 은행 로고.

(서울=뉴스1) 최재헌 기자 = 스탠다드차타드(SC)가 글로벌 대형 은행 중 처음으로 가상자산 현물 거래 시장에 뛰어들었다. 그동안 금융 시장에서 쌓아온 위험 관리 역량을 바탕으로 기관투자가를 공략해 수익 구조를 다각화한다는 전략이다.

반면 한국 금융사는 가상자산을 보관조차 할 수 없어 글로벌 흐름에 뒤처지지 않으려면 규제를 정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SC는 최근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영국 지점에서 비트코인(BTC), 이더리움(ETH) 현물 거래 서비스를 제공한다고 밝혔다. 글로벌 대형 은행이 가상자산 현물 거래를 직접 제공하는 사례는 이번이 처음이다.

해당 서비스는 아시아·유럽 거래 시간대에서 운영되며, 이후 이용자의 수요에 따라 주 5일 24시간 거래로 운영 시간을 확대할 계획이다. 한국으로 치면 업비트·빗썸이 아닌, KB국민은행·신한은행 등 전통 금융기관에서도 가상자산을 사고팔 수 있는 셈이다.

빌 윈터스 SC 그룹 최고 경영자(CEO)는 "가상자산은 금융 혁신의 핵심"이라며 "규제 내에서 이용자가 안전하고 효율적으로 거래하는 서비스를 제공하겠다"고 말했다.

SC의 현물 거래 서비스가 기존 가상자산 거래소와 다른 점은 '기관투자가'만 대상으로 한다는 점이다. SC가 기관들의 관심이 높은 비트코인, 이더리움을 현물 거래 대상으로 선택한 배경이다.

가상자산 마켓메이커(MM) 윈터뮤트는 보고서를 통해 "개인투자자가 밈코인, 알트코인에 주로 투자한 것에 비해 기관은 비트코인, 이더리움 등 메이저 가상자산에 대한 투자를 늘렸다"고 분석했다.

이용자는 별도의 시스템을 설치할 필요 없이 기존 SC의 외환 거래 인터페이스에서 비트코인·이더리움을 거래할 수 있다. 기관이 안전하고 친숙한 환경에서 가상자산을 매수하거나 유동화하는 통합 솔루션을 제공한다는 전략이다.

기관 공략해 수익원 다각화…신뢰 기반으로 OTC 시장 진출 가능성

은행 입장에서도 가상자산 거래 시장에 진출하면 거래 수수료라는 새로운 수익을 확보할 수 있다. 특히 기관투자가를 대상으로 할 경우 장외거래(OTC) 시장에서 우위를 가져갈 수 있다는 분석이다.

조진석 한국디지털에셋(KODA) 대표는 "(OTC 사업을 하는) 미국 가상자산 거래소 코인베이스의 경우 증시에 상장이 됐지만, 다른 거래소들은 전통 금융사 입장에서 보면 은행보다 신뢰도가 떨어질 수 있다"며 "반면 은행은 그동안 쌓아온 신뢰도를 바탕으로 기관들의 큰돈이 오가는 OTC 시장을 노려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골드만삭스는 지난 2022년 미국 투자은행 최초로 가상자산 OTC 서비스를 시작했다. SC도 가상자산 수탁 기업 조디아 커스터디와 OTC 업체 조디아 마켓의 지분을 갖고 있다.

토니 홀 SC 글로벌 트레이딩 책임자는 "(금융) 전문 지식과 인프라, 위험 관리 체계를 가상자산 영역에 적용했다"며 "(우리는) 이용자의 요구를 충족시킬 유리한 위치에 있다"고 전했다.

김병준 디스프레드 연구원은 "은행은 신탁계정 분리 보관과 철저한 모니터링 시스템을 통해 파산 리스크를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다"며 "기관투자가 유입도 확대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SC는 이번 서비스 출시로 기관투자가의 가상자산 시장 진입 장벽을 낮추고 커스터디와 자산 토큰화 등으로 사업 영역을 확대할 방침이다.

글로벌 금융사들이 가상자산 시장에 적극 뛰어드는 반면 한국 금융사는 관련 규제로 직접적인 사업 진출이 사실상 어려운 상황이다. 가상자산 거래소와 실명계좌 제휴를 맺거나 커스터디 기업에 지분을 투자하는 간접적인 방식으로 가상자산 사업에 발을 들인 수준이다.

금융위원회는 올해부터 일부 법인의 가상자산 투자를 단계적으로 허용했지만, 금융사는 그 대상에서 제외했다. 가상자산 리스크가 금융 시스템으로 확산할 가능성을 우려해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판단이다.

이에 따라 업계에선 한국도 금융사의 가상자산 사업 진출을 위한 규제 정비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김 리서처는 "홍콩, 싱가포르 등 아시아 금융 중심 국가와의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으려면 선제 대응이 필요하다"며 "최근 열풍이 부는 스테이블코인과 실물연계자산(RWA) 시장을 선점하려면 이른 시일 내에 규제를 완화하고 명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chsn12@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