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화은행 리스크' 보여준 美 SVB 사태…韓 '은행 과점깨기' 제동 걸리나
자산·부채 만기 구조 관리 미흡했지만 자금 조달·투자처 편중된 '특화은행' 태생적 리스크 지적도
금융당국, 은행 과점 체제 깰 무기로 '특화은행' 검토…실무작업반 우려사항 고스란히 노출
- 서상혁 기자
(서울=뉴스1) 서상혁 기자 = 미국 '실리콘밸리 뱅크'의 파산 사태는 특화은행이 안고 있는 전형적인 리스크를 보여준 사례라는 평가가 나온다. 일차적인 책임은 중앙은행의 기준금리 인상에 대비해 리스크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은행 측에 있으나, 자금 조달과 투자처가 편중된 특화은행의 특성상 금융위기 국면에서 일반 은행보다 리스크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도 있다는 것이다. 금융권에선 특화은행의 줄도산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보고 있다.
연초부터 불거진 미국 특화은행의 비보에 경쟁 촉진에 방점을 찍고 있는 국내 금융당국의 '은행 과점 깨기 프로젝트'에도 제동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은행권 경영·영업 관행·제도 개선 태스크포스(TF)'는 은행의 경쟁을 촉진할 방안으로 '특화은행'을 도입하겠다고 밝히면서 SVB를 대표적인 사례로 소개했는데, 당시 참석자들 사이에서 제기된 특화은행의 약점이 이번 SVB 사태로 고스란히 드러났기 때문이다.
14일 금융권에 따르면 미국 연방예금보험공사는 지난 12일(미국 현지시간) 미국 실리콘밸리 뱅크(SVB)를 폐쇄하고 예금자 보호를 위해 산타클라라 국립 예금 보험 은행을 설립했다. 지난 연말 기준 SVB의 자산 규모는 2090억달러(272조원)로 미국 16위 규모의 은행이다. 2008년 금융위기 당시 워싱턴뮤추얼 이후 가장 큰 규모의 파산이다.
SVB는 벤처기업을 타깃으로 영업하는 미국 내 특화 은행이다. 최근 미국 내 업황이 악화되자 벤처기업들은 그간 맡겨둔 예금을 잇달아 인출했는데, SVB가 예금 지급을 위해 그간 투자해둔 장기 국채를 손실을 보면서 매도한 사실이 알려지자 뱅크런이 발생했다.
금융권은 이번 사태의 일차적인 책임은 SVB에 있다고 봤다. 팬데믹 시기 밀려 들어온 예금을 무분별하게 받은 결과, 리스크가 한껏 부풀었다는 것이다. 박창균 자본시장연구원 부원장은 "이자율을 낮추면서 조절하지 않고 계속해서 예금을 받았다는 게 문제"라며 "SBV가 운영할 능력을 벗어나는 범위의 예금을 받으면서 문제가 더 커지게 됐다"고 꼬집었다.
또 다른 관계자는 "금리인상기엔 장기 채권을 단기로 바꾸는 '듀레이션 조정 작업'을 통해 리스크를 줄이는 게 기본"이라며 "그 작업을 제대로 하지 않은 상황에서 예금 인출 요구를 맞추기 위해 장기 국채를 매각하다 보니 평가손이 손실로 확정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미국 연방예금보험공사(FDIC)에 따르면 SVB의 총예금은 신종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직전인 2019년말 649억달러에서 2021년 1분기 1252억달러, 2022년말인 1753억7000만달러로 불었다.
심지어 2022년말 기준 예금의 87.6%는 요구불 예금으로 전해졌다. 언제든 빠져나갈 수 있는 대기성 자금으로 장기 국공채에 투자한 건 기본을 망각한 일이라는 지적이다. SVB는 유동성커버리지비율(LCR)이라는 기본적인 유동성 규제도 적용받지 않았다.
금융권 관계자는 "초단기로 조달해온 자금으로 장기 국채에 투자하는 건 '자산과 부채의 만기 구조 관리'라는 아주 기본적인 시스템조차 이뤄지지 않았다는 뜻"이라며 "관리를 느슨하게 한 미국 금융감독 당국에도 책임이 있다"고 지적했다.
근본적인 원인으로는 특화은행의 '태생적 리스크'가 지목된다. 자금 조달 창구와 투자처가 편중된 특화은행 특성상, 연준의 공격적인 기준금리 인상 같은 외부 변수에 크게 흔들릴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신용상 한국금융연구원 금융리스크연구센터장은 "자금 조달이나 운용 경로가 단순할 경우 현재와 같은 고금리 기조 하에선 자금 경색이나 부실 위험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SVB가 장기 국채에 무리하게 투자할 수밖에 없었던 배경도 특수한 비즈니스 모델에 기인한다. SVB는 팬데믹 시기 기업공개(IPO)를 통해 벤처기업들이 끌어모은 자금을 예금으로 유치했는데, 당시 유동성이 넘쳐났던 탓에 SVB로부터 기업들이 대출을 받을 유인이 없었다. 깐깐한 심사를 받아야 하는 대출보다는 '투자'를 선호했던 업계 특성도 한몫했다. 수익에 대한 압박이 커지면서 장기 국채에 눈을 돌렸는데, 금리 인상기를 맞닥뜨리며 대거 손실을 본 것이다.
FDIC에 따르면 SVB의 국공채 등 증권자산은 2019년 277억달러에서 2021년 1분기 670억달러, 2022년말엔 1173억달러로 늘었다. 반면 대출 자산은 2019년말 328억달러에서 2022년말 736억달러로 느는 데 그쳤다. 2020년 4분기말 기준 증권자산이 474억달러로 대출자산(447억달러)를 앞질렀다.
금융권은 SVB와 같은 특화은행의 줄도산 가능성도 작지 않다고 보고 있다. 지난 10일 SVB 파산 이후 암호화폐 산업 전문은행인 시그니처은행도 12일 파산했다. 주요 외신들은 퍼스트리퍼블릭은행·팩웨스트뱅코프가 다음 순서라는 관측도 나온다.
특화은행의 대표 격인 SVB가 쓰러지면서 금융당국의 '은행 과점 깨기' 프로젝트에도 제동이 걸렸다. 금융당국은 '은행권 경영·영업 관행·제도 개선 태스크포스(TF)'에서 경쟁 촉진 방안으로 소규모 특화은행을 도입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는데, 당시 소개된 특화은행의 리스크가 이번 SVB 사태와 꼭 닮아있기 때문이다.
지난 2일 TF 실무작업반 회의에서 SVB는 "별도 인가단위에 따른 특화은행은 아니지만, 사실상 고위험 벤처기업만을 고객으로 상대하는 특화은행처럼 기능한다"고 소개가 됐는데, 당시 참석자들 사이에선 "특정 여신 부문에만 집중하는 은행은 해당 부문의 자산건전성 충격을 다른 부문의 여신을 통해 흡수하기 어려워 더 높은 수준의 자본적정성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왔다.
금융당국도 리스크로 소개된 사례가 현실화되면서 적잖게 당황한 분위기다. 다만 방안 채택 여부에 대해선 확대 해석을 경계했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SVB 사태는 은행이 리스크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서 생긴 문제이지, 특화은행 자체가 그러한 위험을 갖고 있는 건 아니다"라며 "아직 정해진 건 없다"고 말했다.
hyuk@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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