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디자이너 이상봉, 31년 패션 인생과 ‘낭만에 대하여’
예술을 사랑하는 디자이너, 패션에 담긴 그의 삶과 철학
- 박시은 기자
(서울=뉴스1) 박시은 기자 = 무려 31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옷’과 동행해온 디자이너 이상봉의 컬렉션은 유독 감성적이다. 세월과 함께 디자이너의 감성도 나이를 먹어간다는 것을 은연 중에 인정되고 있는 정설이지만 이상봉의 디자인은 시간을 잊은 듯 매번 신선한 작품을 런웨이에 펼쳐 보여 놀라움을 안긴다.
한글에서부터 단청, 태극기, 무궁화 등 가장 한국적인 주제를 컬렉션으로 풀어놓는 그의 재주는 이미 해외 패션계에서도 화두에 오른 지 오래다. 이처럼 일찌감치 해외 진출에 물꼬를 튼 디자이너 이상봉은 K-패션의 1세대 수장으로서, 무거운 책임감을 싣고 그 역할을 이어나가고 있다.
도전의 거듭해온 패션과 예술을 사랑하는 ‘낭만적인 디자이너’ 이상봉. 강산의 변화를 여러 번 경험했을 만큼 오랫동안 이어져온 그의 패션 스토리는 현재까지도 활발하게 쓰이고 있다.
Q. 31년 동안 걸어온 패션의 길. 톱 디자이너로 롱런할 수 있는 비결은?
브랜드를 오픈하자마자 당시 가장 인기였던 월간 여성종합잡지 ‘여원’에 소개되고, 수많은 언론과 인터뷰를 진행하게 되면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또한 론칭과 동시에 컬렉션을 진행하는 등 디자이너로서 순조로운 출발을 할 수 있었고, 업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디자이너로 손꼽히기도 했다.
이처럼 좋은 기회들이 뒷받침을 해줄 때마다 더욱 새롭고 신선한 디자인을 보여주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지금도 디자이너로 활동하는 한은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싶다는 생각을 늘 가지고 있다. 젊은 세대들과 함께 공감할 수 있는 디자인을 만들어 내는 노력들이, 오랜 시간 동안 지치지 않고 한 길을 갈 수 있었던 원동력으로 작용한 것 같다.
Q. 첫 해외 진출은 국내 패션계에서 보기 드문 도전이었다. 과정이 힘들지 않았나?
당시 급작스럽게 찾아온 IMF로 인해 패션계뿐만 아니라, 모든 기업이 위기와 직면한 상황이었다. 국내 시장이 어려워지자 해외에 나가서라도 옷을 팔아야 하는 상황이었고, 첫 해외 진출은 그렇게 시작하게 됐다.
그 무렵 파리 컬렉션에서는 디자인을 출품하면 해당 부스에 각 나라의 국기를 달도록 돼있었다. 아시아 국가 중에서는 일본과 한국이 유일했는데, 나의 작품을 전시할 부스에 ‘북한’ 국기가 떡하니 달려있는 것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 했다. 큰 충격을 받고 사무국으로 달려가 정정 요청을 해야 할 만큼, 한국이라는 나라조차 모르는 곳에서 디자이너 생활을 이어간다는 것은 서러움의 연속이었다
한국을 모르는 서러움에 덧붙여, 도움을 바라거나 기댈 곳 하나 없이 혼자 모든 것을 해나가야 한다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 전문적인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혼자 힘으로 컬렉션부터 마케팅까지 준비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도전이었지만 멈추지 않고 부딪혀온 결과 2002년 파리에서 ‘이상봉 컬렉션’ 런웨이를 선보일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마음 한편이 짠해질 만큼 수많은 고생을 통해 얻은 결과물이었다.
Q. 해외 진출에 도전했던 1998년은 IMF로 시국이 혼란스러웠다. 당시 선보였던 컬렉션 의상과 무대가 큰 화제였는데
외환위기로 나라 전체가 무거운 분위기를 띄고 있었다. 신문을 펼치면 헤드라인의 90% 이상이 위기에 관한 내용이었고, 이를 극복하고자 ‘금 모으기 운동’을 펼치는 등 국민의 단합성에 감동을 하기도 했다. 이에 영감을 받아 선보인 서울컬렉션의 테마는 ‘신문’이었다.
신문이 가득 프린트된 의상을 런웨이에 대거 선보였고, 피날레 무대에서 모델들이 모두 신발을 벗고 퇴장하는 퍼포먼스를 선보이기도 했다. 신발을 벗고 뛰어내리고 싶을 만큼 힘들었던 모두의 마음을 이렇게나마 위로하고 싶었다. 이처럼 모든 국민에게 상처였던 IMF가 스스로에게는 큰 도전이 됐고, 그로 인해 조금 더 디자이너로서 성장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됐다고 생각한다.
Q. ‘예술을 사랑하는 디자이너’, 패션과 문화가 결합된 행사를 지속하는 이유는? ‘신(新) 창조’, 즉 새로운 것을 만들기 위해 디자이너들이 가장 많이 시도하는 부분이 컬래버레이션이다. 장르와 장르가 결합해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 내는 시도는 가장 처음 컬렉션을 준비하던 순간부터 시작됐다. 이상봉의 컬렉션에는 음악부터 퍼포먼스까지 예술성이 들어가지 않은 부분이 없다. 이 때문에 “패션쇼가 예술인가?”라고 비난하는 시각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이 내가 가진 가장 분명한 색깔이며 하나의 콘텐츠를 생성하기 위해 영상과 음악, 무용 등 다양한 문화를 결합한 재미있는 시도를 지속하고 있다. 앞으로도 모두가 함께 즐길 수 있는 컬렉션을 만드는 것이 나의 목표다. 패션에 담긴 디자이너의 목적을 분명하게 전달할 수 있다면 음악이던 무용이던 미술이던 장르를 가리지 않고, 옷과의 연결고리를 만들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Q.‘K 패션’의 성장과 앞으로의 전망을 어떻게 보는지
아시아 패션의 중심지가 ‘서울’이라는 것은 누구도 부정 못하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최근 중국 패션이 급속 성장을 거듭하면서, 불과 3년 후에는 아시아 중심의 자리를 중국에 내어줄 수도 있다는 예측이 나오기도 한다. 실제로 10~20대를 겨냥한 ‘스트리트 패션’은 한국 패션계도 긴장할 만큼 중국이 바짝 쫓아왔지만, ‘하이패션’은 아직까지 한국에 비해 역부족인 상황이다. 그게 바로 디자이너 브랜드다.
전문가들은 중국의 경제발전을 일으킨 40~50대의 소비자들이 입을 옷은 중국에 없다고 평가한다. 이 때문에 하이패션의 강국인 한국 디자이너 브랜드가 중국에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상황이다. 실제로 서구화되지 않은 중국의 ‘동양적인 감성’을 충족시켜줄 수 있는 유일한 곳은 아직까지 한국뿐이다.
이처럼 봉제와 생산 등의 기술력은 중국이 위에 있지만 디자이너의 감성만 유일하게 한국이 앞서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하이브랜드마저도 3~5년 안에 중국이 동등하게 따라잡을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따라서 스스로 자생할 수 있는 기술력을 키우고, 중국의 40~50대가 가져갈 수 있는 하이패션에 대한 끊임없는 고민만이 K-패션을 우위에 세울 수 있는 길이다.
Q. 2017 S/S 컬렉션의 테마인 ‘책가도’의 콘셉트가 무척 독특했다
예술의 전당에서 하는 ‘책가도’ 전시회를 보고 영감을 받아 컬렉션을 착안하게 됐다. ‘책가도’는 쌓아놓은 책 더미에 여러 가지 일상용품을 배치해, 개인의 삶과 취향을 한 공간에 담아낸 조선 후기 유행했던 회화 작품이다. 이처럼 층층이 물건을 쌓아 전시하는 구조의 책가도와 비슷한 ‘책장’은 예로부터 지식의 수준을 대변하는 상징적인 존재로 여겨져 왔다.
실제로 집집마다 가장 잘 보이는 공간에 책장 가득 책과 소품을 빼곡하게 채워두고, 이를 통해 지식의 수준을 은근히 드러내기도 한다. 이러한 풍습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유명 카페나 패션숍을 가도 자신만의 책장을 꾸미고 소품을 전시해둔 모습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현대사회에서 책이 점차 멀어져 간다고 해도, 여전히 책장은 우리의 삶 속에 트렌드가 될 것이고 라이프스타일의 한 부분으로 유지되고 있는 상황이다. 따라서 과거의 ‘책가도’를 어떻게 현대화 시킬지에 대한 고민을 컬렉션 준비 내내 이어왔으며, 그에 대한 해답으로 책가도의 그림 속 구조적인 감성과 전통적인 분위기를 패션으로 재해석하게 됐다.
Q. 지난 10월 출간된 책 소개 및 앞으로의 활동 계획에 대해 말해달라
‘Moments by Lie Sangbong’은 지난해 30주년을 맞이한 브랜드 ‘이상봉’의 작업 순간들을 담아낸 패션 아트 북이다. 9가지 테마별로 영감을 받은 순간부터 결과로 나오기까지의 과정을 그려냈으며 영감, 준비 과정, 화보 등을 총망라한 비주얼 다이어리’다. 수익금의 일부는 패션 공부하는 고등학생들을 위해 사용될 예정이다.
반면 12월은 강연 일정으로 중국에 주로 머물 계획이며, 내년 1월에는 6년째 지속하고 있는 다문화 어린이를 위한 파티도 시행한다. 시국이 좋지 않아 행사를 진행하기에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었지만, 파티를 기다리는 아이들을 위해 기간을 더는 미룰 수 없어 오는 1월로 날짜를 정하게 됐다.
그 밖에도 앞으로 문화 콘텐츠를 새롭게 만들어 내는 디자이너로서 다음 컬렉션을 준비하고 싶다. 다음 컬렉션의 테마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지만 전통적인 문화를 패션으로 재해석해 컬렉션에 싣는 것을 목표로 심혈을 기울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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