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시장 1천만②]황정민 "내 인생에 이런 영화 있다는 것, 행복하죠"(인터뷰)
- 장아름 기자
(서울=뉴스1스포츠) 장아름 기자 = 배우 황정민의 연기 인생에 최다 관객수를 동원한 영화 한 편이 탄생했다.
그는 지난달 17일 개봉한 영화 '국제시장'(감독 윤제균)으로 그의 필모그래피 사상 첫 1000만 영화를 보유하게 됐다. 영화 '너는 내 운명'과 '사생결단', '댄싱퀸', '신세계' 등 다양한 장르에서 다양한 연기 스펙트럼을 오가며 관객들에게 사랑을 받아온 그였지만, 작품성으로 호평을 받는 것과 별개로 스크린 성적에서는 다소 아쉬운 부분이 있었던 것도 사실. 그는 최근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진행된 인터뷰에서 '국제시장'의 흥행 추이를 보며 "이렇게 빠른 흥행 속도는 내 인생에서도 처음"이라고 말하며 웃어 보였다.
황정민은 '국제시장'에서 오직 가족을 위해 굳세게 살아온 아버지 덕수 역을 맡았다. 덕수는 누구보다 고단하고 치열하게 살아온 우리들의 아버지 상을 대표하는 인물로, 한국전쟁 당시 헤어진 아버지를 대신해 어머니와 동생들을 돌보게 된다. 광부로 독일에 3년 간 파견되기도 하고, 막내 동생 끝순(김슬기 분)을 위해 월남전에 참전하기도 한다. 6.25 전쟁 이후 자신들에게 따뜻한 보금자리를 허락했던 고모(라미란 분)가 운영해온 수입상점 '꽃분이네'를 지켜내기 위해 인생을 바치는, 대한민국 50년 세월을 관통해온 인물인 셈이다.
"영화를 보는 데 첫 장면부터 눈물이 나오더라고요. 영화를 보니까 촬영하면서 잊고 있던 감정들이 새삼 다시 떠올랐어요. 그때 내가 어떤 감정으로 연기를 했는지 나는 알고 있는 거잖아요. 어린 덕수가 아버지(정진영 분)와 헤어지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계속 나는 거예요. 언론시사회 때 휴지를 미리 받았는데 이미 초반에 다 써버렸어요. (웃음) 옆에 앉아 있던 (장)영남이가 제게 조용히 휴지를 쥐어주더라고요."
윤제균 감독은 '국제시장' 시나리오를 쓸 때부터 황정민 캐스팅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황정민의 어떤 면을 보고 덕수 역에 캐스팅한 것일까 물어보니 "그러니까요. 감독님이 왜 그랬을까요. 여타 배우들이 캐스팅이 잘 안 됐었나. 그래서 내게 온 게 아닐까요"라며 겸손한 모습을 보였다.
"감독님이 대본을 쓰시면서 황정민이 덕수 역할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하셨다고 하시더라고요. 아마 덕수의 20대, 30대부터 70대까지 전부 어울리는 사람이 누구일까 생각하다가 저를 선택하셨던 것 같아요. 감독님하고는 이번 영화가 첫 작업이지만 제작자로서도 제가 어떤 사람인지 보셨던 부분이 있었을 거예요. 그게 아마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요."
황정민이 덕수가 아니었다면 '국제시장'이 2015년 첫 1000만 영화로 기억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사실 덕수는 특수한 관점에서 창조된 인물이 아니다. 굴곡진 한국의 50년 역사를 관통해 살아온 인물일 뿐, 그의 캐릭터에서 특수성을 찾아보긴 힘들다. 특수한 캐릭터라는 건 배우의 개인적인 경험과 자체적인 해석으로 새롭게 만들어낼 수 있는 부분이지만, 보편적인 캐릭터는 그렇지 않다. 우리 모두의 아버지를 연기해야 하는 막중한 책임감을 느꼈을 터였다.
"아버지라는 이름의 보편성 때문에 책임감이 막중했죠. 덕수라는 인물 자체가 '하나로 치우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냥 보편적인 인물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어떤 시퀀스에서는 덕수를 보면서 '어라, 우리 아버지네?'라는 걸 느꼈으면 좋겠더라고요. 그게 내가 영화를 해야 하는 이유 중 하나였고 캐릭터를 구성해 나갈 때 제일 중요하게 생각했던 부분 중 하나였어요. 되도록 도드라지거나, 색깔을 입히지 말자, 되도록이면 평범하게 연기하자고 했죠."
보편성을 연기한다는 것은 배우에게도 그 자체로 도전이다. 감독의 연출력도 중요하지만 누구에게나 공감대를 형성하는 캐릭터를 만든다는 것, 매 시퀀스마다 덕수를 통해 자신들의 아버지들 느끼게 한다는 것은 온전히 배우의 몫에 해당되기도 했다. 각 시퀀스에게 무던하게 우리 아버지들의 모습을 녹여내는 황정민의 연기에서 자신감이 느껴졌다.
"처음 대본을 읽고 나서 도대체 이걸 어떻게 풀어야 하는가 고민이 너무 많았어요. 왜 도대체 이 시기에 이 작품을 왜 해야 하고 관객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하는지 저 스스로도 궁금했어요. 그냥 연기하면 되는 게 아니었거든요. 덕수라는 인물에 기본적으로 깔린 정신과 사상을 이해하고 공감해야 했어요. 황정민이 연기하지만 어떤 지점에서 어느 순간 덕수를 마주하고, 덕수를 보면서 아버지를 회상하는 게 중요한 거잖아요. 황정민이라는 배우를 잊게 해야 한다는 자신감은 분명히 있었지만 이런 자신감을 얻기 까지 많은 고민들이 선행돼야 했어요."
황정민은 자신을 지우고 덕수로 관객들 앞에 서는 과정이 재미 있었다고 털어놨다. 배우니까, 그가 해야 하는 일이니까, 즐거운 작업이었다고. 그간 다양한 작품을 통해 캐릭터를 설정하는 과정을 거쳐왔기에 크게 어려운 일이 없었다고도 했다. 인물을 구현하는 건 직접 취재하고 연습하는 과정을 거치면 가능한 일이었지만, 그보다 캐릭터 저변에 깔린 사상과 정신을 전달하는 일이 더 중요했다고 털어놨다.
"50년 이상의 시대를 관통하는 영화에서 연기하는 것에 대한 부담감은 없었어요. 다만 이걸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부담스럽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더라고요. 계속 서사가 클라이맥스를 치잖아요. 이게 부담스럽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감독님과도 많은 얘기를 나눴어요. 격정적인 순간들을 발췌해서 스크린에 다 담아내니까 부담스러울 수 있잖아요. 다행인 건 아닌 관객들도 있겠지만, 대개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넘기는 것 같더라고요. 편집도 잘 됐고, 이런 걸 감독님이 잘 마무리 지으신 것 같아요."
황정민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덕수의 70대였다. 그는 덕수의 70대 모습을 위해 특수 분장을 감행했다. 미리 본 70대의 모습이 어땠느냐고 물으니 "난 그렇게 안 늙을 거예요. 잘 늙고 싶어요"라고 너스레를 떨다가도 "주름은 배우에게 있어서 최고의 무기예요. 40대 라면 40대다워야 해요. 그래야 관객들이 생경한 기분이 들지 않죠"라고 자신의 생각을 밝히기도 했다. 그렇지만 20대 CG는 만족스러웠다고 말하며 웃어 보였다.
"제게는 70대가 가장 중요했어요. 덕수의 70대가 덕수 인생의 결론이니까. 70대는 덕수가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일생동안의 삶과 생각, 사상이 집약돼 있는 셈이죠. 70대를 잘 이야기 해야 2, 30대를 모두 관통할 수 있다고 봤어요. 수많은 시장 상인들의 멸시를 받으며 그 자리를 버티고 자식들과 벽을 쌓으면서 괴팍하게 굴고, 그게 덕수를 버티게 하는 힘이고 장치였어요. 나중에 '아버지, 나 정말 힘들었거든요'라고 말하는데 그때 덕수의 속내가 묻어 나잖아요. 그래서 영화의 처음과 나중, 중간에 잠깐 나올 뿐이지만 70대가 가장 중요했다고 봐요."
황정민은 몇 번이고 관객을 울린다. 탄광이 무너지는 장면에서, 베트남 아이를 구하러 물로 뛰어드는 장면에서, 그리고 이산가족찾기 현장에서 잃어버린 동생 막순이를 찾는 장면에서 관객들은 덕수와 함께 눈물을 흘린다. 촬영 당시 상황에 대해 묻자 그렇게 밖에 연기가 나올 수 없었다며 상당 부분 로케이션에서 좋은 영향을 받았다고 말했다.
"감정연기를 특별하게 펼쳤다기 보다 연기가 그렇게 밖에 나올 수 없었어요. 로케이션의 도움을 많이 받아서 그렇게 연기가 되더라고요. 체코의 탄광 박물관을 갔을 때 그렇게 먹먹할 수가 없었거든요. 그냥 감정적으로 무장해제되는 느낌이랄까요. 그냥 '어떻게 여기서 사람이 3년을 버텼지? 단 10분도 못 있을텐데'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탄광 안에 들어가면 이런 느낌을 잘 살려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 공간 안에 있다보니까 절로 감정이 만들어지더라고요."
황정민은 덕수는 물론 여타 캐릭터를 연기하기에 앞서 가장 먼저 했던 일은 자신을 지우는 작업이라고 했다. 자신의 본래 모습에 캐릭터를 덧입히는 과정이 아닌, 그 캐릭터 자체로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는 것이 그만의 연기 지론이기도 했다. 그가 출연했던 영화들을 새삼 곱씹어 보면 황정민이라는 배우는 각 작품에서 각기 다른 색채로 빛났다.
"어떤 작품을 하든 간에 제가 가장 처음하는 작업이 황정민을 떨어트리는 작업이예요. 그걸 안 하면 관객들은 황정민을 보러 오는 것이 거든요. 난 그걸 일종의 배반이라고 생각해요. 물론 황정민이 연기를 하지만, 관객들은 덕수를 봐야 하는 거고 나는 그걸 보여 줘야 하는 거예요. 황정민의 삶이 아닌 덕수의 삶을요. 물론 연기하면 황정민이 무의식 중에 나올 수 있겠죠. 하지만 어떻게든 철저하게 황정민이라는 사람을 배제시키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중요한 것 아닐까요."
황정민은 '국제시장'의 미덕으로 동 시대 사람들 간의 '감정 공유'라고 밝혔다. 다소 난해한 정치적 해석이나 역사적 해석보다는 아버지에 대한 추억이, 아버지에 대한 마음이 더 특별하다고 했다.
"이런 영화가 내 인생에서 나올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행복해요. 동 시대 사람들만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을 공유하고 나눌 수 있다는 게 너무 행복한 것 같아요. 10년 뒤면 못 느낄 수도 있는 감정일텐데 지금 함께 느낄 수 있다는 게 기쁘네요. 내가 고민한 것들을 덕수를 통해 관객들과 소통할 수 있어서 참 감사해요."
aluem_chang@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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