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의 배우도 아닌 윤여정(인터뷰①)
- 장아름 기자
(서울=뉴스1스포츠) 장아름 기자 = 진짜 프로다운 배우는 자신이 맡았던 역할을 사적 공간으로까지 끌어들이지 않는 이일 것이다. 배역에 극한으로 몰입된 나머지 미처 헤어나오지 못했다고 말하는 이들이 프로페셔널하지 않다는 건 아니지만 "배우라는 직업이 특별한가요? 연기가 끝나는 순간 내 아들들에게는 엄마가 돼야지"라고 말하는 이가 비교적 진실돼 보인다. 누군가의 인생을 대신 살아내는 연기는 분명 숭고한 것이나 스크린 내외의 경계를 분명히 구분 짓고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해 진솔하게 접근해보려 하는 이가 '진짜 배우'이지 싶다. '나'라는 견고한 중심이 없는 연기는 잠깐의 눈 속임은 가능할지언정 결코 신뢰를 줄 수 없다.
배우 윤여정(68)의 테이블 앞에는 화이트 와인 한 잔이 놓여 있었다. 알코올의 힘을 빌린 대화는 더욱 전형적일리 없었지만 기품이 상실되지 않는다는 건 아이러니한 지점이었다. 톡톡 쏘는 농담조는 상대를 긴장하게 했으나 그 어떤 질문이라도 수용 가능한 넓은 가슴이 상대를 안심하게 한다. 그 누구의 물음에도 귀를 기울이고 진지하게 생각하고 신중하게 답하는 모습이 진심이 담긴 대화로 이끌었다. 오가는 이야기 속에 놀라웠던 것은 영화 '장수상회' 속 성칠(박근형 분)의 마음을 빼앗아 가는 수줍은 꽃집 여인 금님의 모습이 인간 윤여정과는 전혀 접점이 없었다는 점이었다.
인간 윤여정으로부터 파생된 금님과 영화 '돈의 맛' 백금옥, '하녀' 병식, '자유의 언덕' 구옥, '다른 나라에서' 박숙, 드라마 '참 좋은 시절' 장소심, '넝쿨째 굴러들어온 당신' 엄청애, '그들이 사는 세상' 오민숙은 그 누구의 여자도 엄마도 아닌 윤여정의 고유명사 격인 캐릭터라 더욱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70세에 가까운 나이이지만 누군가의 엄마나 할머니로 연기 스펙트럼이 좁혀지지 않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홍상수, 임상수, 이재용 등 충무로 최고의 감독의 뮤즈로 꼽히고 있지만 정작 자신은 부인한다. "뮤즈요? 누가 뮤즈야. 그냥 단역이지." 역시 당신은 누구의 배우도 아닌 윤여정이다.
Q. 영화를 보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하더라.
A. 팔이 안으로 굽잖아요. 내 새끼 단점은 정말 몰라요.
Q. 시나리오를 처음 봤을 때 느낌이 궁금하다.
A. 시나리오를 보고 금님이 꽃뱀인 줄 알았어요. 오그라들기도 했었어요. 웬 할머니가 쫓아다니나 싶었죠. 상업 영화라 하면 손님이 들어서 본전을 건지자는 얘기인데 반신반의를 했었어요. 그런데 그냥 좋은 일이겠다 싶으니까 해야겠다고 생각이 들었어요.
Q. 반신반의를 했다면 어떤 이유 때문일까.
A. 늙으면 기우가 많아지잖아요. 나는 늘 반신반의하는 사람이라 이걸 누가 보러 올까 싶었던 거지. 누가 나와 박근형 선생님의 로맨스를 궁금해할까 싶었어요. (웃음) 그리고 황혼의 로맨스라고 소개되고 있지만 나는 이 영화에 그렇게 접근하지 않았거든요. 나는 금님을 그냥 열심히 살아온 사람이라고 봤어요.
Q. 대중이 생각하는 윤여정은 여전히 도도하고 깐깐한 여배우다. 그런 윤여정이 소녀 같은 금님으로 분했을 때의 어떤 모습일까 기대하기도 하는 것 같다.
A. 어느 배우나 다 그렇겠지만 어떤 감독을 만나느냐가 제일 중요해요. 평소에 꽃무늬 옷은 잠옷으로도 안 입고 핑크 컬러는 사 본적도 없어요. 우선 감독이 나를 외향적으로 바꾸려 했죠. 어렸을 때 같았으면 안 입는다고 고집을 부렸을 텐데 이젠 스폰지처럼 받아들일 수 있게 됐네요.
Q. 강제규 감독도 대배우 격인 박근형, 윤여정과 작업하기 쉽지 않았을 것 같다.
A. 대배우라니. 그냥 노배우지 뭐. 사실 우리한테 뭐라고 할 수 있는 분은 나이로 치면 임권택 감독님 밖에 없어요. 다 우리보다도 어리니까. 그런데 내가 강제규 감독에게 그랬어요. 우린 당신의 도구니까 우리 나이는 잊고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라고.
Q. 연기 경력 50년에 가까운 배우가 감독에게 작품의 도구로 쓰라고 말한 점이 놀랍다.
A. 나는 사실 성칠만 모르는 비밀을 일부러 조금씩 흘려 놓으려 했는데. (웃음) 반전에 대해서는 전혀 예상할 수 없게 편집이 됐더라고요. 관객들이 눈치 챌까봐 다 쳐냈나봐요. 물론 난 편집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사람이니까. 그래도 감독의 의도를 따라야죠.
Q. 일부러 조금씩 흘려둔 장면이라면 어떤 장면일까.
A. 장례비 담긴 봉투 보고 우는 장면 있잖아요. 난 그때 너무 연기하면서도 괴로웠어요.
Q. 성칠과 금님의 왈츠 장면도 인상 깊었다.
A. 그런게 박근형 선생님이 연습을 안 해온 것 같더라고. (웃음) 오래 산 게 좋은 건 선배를 대하는 법에 있는 건데 예전에는 나한테 뭐라고 하면 듣기는 싫지만 듣는 척 하는 게 있었거든요. 이번에는 적극적으로 틀린 게 있으면 말하고 그랬죠. 그렇게 하니까 좋더라고요.
Q. 드라마 '장희빈' 이후로 40년만에 박근형과 재회했다.
A. 당시에 이미 박근형 선생님은 연극계에서도 연극을 너무 잘하는 배우로 소문나 있었어요. 얼굴도 잘생겼는데 연기까지 잘하는 배우였죠. 너무 잘 해서 성질이 나더라고. 나한테 자꾸 지적도 하니까. (웃음) 이제 70이라는 나이가 들어서 만나게 됐는데 서로 세월을 워낙 많이 겪다보니 편안해졌어요. 같이 늙어가는 거니까 선생님도 나를 편안하게 보시지 않았을까요.
Q. 70세의 나이에도 여전히 최고의 감독들이 꼽는 뮤즈 아닌가. 홍상수와 임상수, 이재용의 작품에 연이어 출연했다.
A. 뮤즈는 무슨 그냥 단역이지 뭐. 홍상수 감독은 밤을 새서 촬영을 하는데 난 그때 이게 무슨 경우인가 싶어서 다신 안 하겠다고 맹세했었어요. 그런데 시사회에서 영화를 보고 홍상수 감독에게 가서 앞으로 시켜주면 잘 하겠다고 했죠. (웃음) 그 이후로 잊지 않고 불러주더라고. 그런데 항상 노인 역이야. 하하. 그의 장기도 잘 알고 그 오만함도 잘 알기 때문에 영광이라고 생각해요. 적은 돈으로도 장인 정신을 갖고 만드니까.
Q. 윤여정은 배우로서의 삶과 본인의 삶이 철저하게 구분돼 있는 배우 같다.
A. 나는 배우라는 직업을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아요. 그냥 직업이죠. 남들과 다른 직업을 갖고 있을 뿐이에요. 나는 내 아들들에게 특별한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냥 엄마이면 돼요. 배우라고 해서 누려야 하고 고뇌해야 하고 그럴 필요는 없죠. 그건 내가 카메라 앞에서 연기를 할 때만 그렇게 하면 돼요.
Q. 윤여정을 지금으로 이끈 원동력이 열등감 때문이라고 했는데.
A. 우리 때는 선남선녀만 배우를 했어요. 너무 예쁜 사람이 아니면 배우를 못하는데 난 배우가 됐어요. 저 사람들과 달라야 한다는 생각으로 노력을 많이 했고 그게 지금까지 배우를 계속하는 이유가 아닐까요. 난 연기를 할 때 내가 그 배역의 상황에 실제로 처해 있다고 생각하고 연기를 해요. 어떤 연기든지 내 자신에게서 시작되는 거죠.
Q. 향우 여배우 윤여정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A. 난 60세가 넘으면 연기를 즐기기로 마음을 먹었어요. 연기를 일로 하면서 많이 힘들었으니까. 솔직히 돈 때문에 할 때도 많았는데 이제는 정말 즐기면서 하기로 두 가지 규칙을 정했어요. 해본 역할은 안 할 것, 작품은 들어오는 순서대로 할 것이라는 규칙이죠. 하나씩 해갈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결국은 매너리즘에 빠질 수밖에 없으니까.
Q. 버킷 리스트가 있나.
A. 버킷 리스트요? 난 없어요. 그냥 매일을 즐기는 거죠. 인생 경험에 의하면 아프지 않고 아쉽지 않은 인생은 결코 없어요. 그래서 내일을 즐기기 위해 애쓰고 있죠. 지금 내 인생은 보너스와도 같으니까.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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