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이 흥행을 만든다, 감독 이병헌式 매뉴얼(인터뷰①)

(서울=뉴스1스포츠) 장아름 기자 = 이병헌 감독(36)은 첫 상업 영화 '스물'의 언론시사회 이후 평을 하나하나 찾아서 꼼꼼하게 읽어보고 있다고 했다. 영화에 대한 많고 많은 평 중에 기억에 남는 평은 "감독이 약 빤 것 같다"는 말이었다고. '약 빨았다'는 표현은 약을 먹고 만든 게 아닐까 의심될 만큼 일반적이고 보편적이지 않다는 시쳇말이다. 황당하면서도 파격적인 내용에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카타르시스를 느꼈을 때 절로 나오는, 작품을 향한 관객들의 최고의 찬사이기도 하다.

'스물'은 코미디 장르의 영화로 스무살 동갑내기 치호(김우빈 분)와 동우(이준호 분), 경재(강하늘 분)의 이야기를 그리지만 기존 청춘 영화들과는 다른, 범상치 않은 지점 몇 가지가 존재했다. 일상의 흐름을 따라가며 영화의 일정한 플롯을 갖춰나가다가도 그 전형성을 조롱하기라도 하듯 뜬금 없이 그 순리를 전복시킨다. 드라마틱한 갈등과 과도한 감정 강요로 영화 구성에 애써 힘을 주지 않으면서 기존 영화에서 선뜻 구현하지 못했던 황당무계한 이미지를 자유롭게 표현했다.

이병헌 감독이 최근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진행된 인터뷰에서 영화 '스물' 개봉을 앞둔 소감을 털어놨다. ⓒ News1 스포츠 / 권현진 기자

이병헌 감독의 전작이자 자전적인 이야기가 담긴 '힘내세요, 병헌씨'를 본 이들이라면 그만의 연출 성향을 금방 눈치 챌 수 있다. 영화에서 주인공인 이병헌은 망연자실해 있는 자신을 찍고 있는 카메라를 향해 뜬금 없이 말한다. "오드리 햅번이 지구에서 제일 예뻐"라고. 그리고는 "왜? 내가 지금 그런 생각 하고 있으면 안 되는 거야?"라며 "전개상 흐름과 맞지 않아? 왜 흐름을 당신이 정해? 복선 깔고 개연성 있게 구성해야 되는 거야?"라고 되묻는다.

충무로에서 자신의 취향이 고스란히 집약된 영화를 완성시키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보편성에 의거한 취향이 아니라면 제작사와 투자사 모두 망설이기 마련이다. '스물' 역시 세상에 나오기까지 꼬박 10년이 걸린 영화였다. 영화 '네버 엔딩스토리' 시나리오와 비슷한 시기에 팔렸지만 연출 제안을 받은 시기는 1년 여 전이다. 영화 '써니'와 '타짜-신의 손', '오늘의 연애'에서 보여준 대사 발 감각을 살려 시나리오 전면 수정에 들어갔고 캐스팅을 거쳐 지금의 '스물'을 탄생시켰다.

'스물'은 개봉 전부터 높은 예매율을 기록하더니 외화에 밀려 있던 국내 비수기 극장가에서 박스오피스 상위권을 평정하고 있다. 이병헌 감독은 자신의 취향에 호불호가 갈릴 수 있을 것이라고 우려했지만 기우였다. 인터뷰 말미 다른 감독들의 영화를 보는 것 외에 일상에서 관심을 두고 있는 일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지금으로서는 영화 밖에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아직 못 다한 이야기가 많다는, 천부적인 이야기꾼다운 대답이었다.

이병헌 감독이 최근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진행된 인터뷰에서 영화 '스물' 속 치호와 동우, 경재 이름에 얽힌 비화를 공개했다. 그는 "치호는 군대에 있던 선임의 이름이다. 이름이 예뻐서 기억하고 있었고 동우와 경재는 실제 내 친구 이름"이라고 했다. ⓒ News1 스포츠 / 권현진 기자

Q. '스물'은 어떻게 시작하게 된 영화인가.

A. 10년 전에 써둔 시나리오였다. 처음 시나리오를 쓸 때라서 영화에 대한 대단한 접근을 할 때가 아니라 당장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쓴 것이었다. 20대를 다뤘던 내용이라 산만하기도 하고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게 느껴지기도 하더라. 제작사 대표님에게 연출을 의뢰받으면서 영화에 대한 기획적인 포인트가 분명하게 있어야 한다는 걸 알게 됐다. 어른도 아니고 애도 아닌, 어설픈 나이에 대한 그림들을 재미있게 그려보려 각색을 시작했다.

Q. 세 인물들 중 경재의 시점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

A. 이야기가 많거나 어려운 것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대중 상업 영화인 만큼 친절해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서 내레이션을 넣어야겠다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하게 됐다. 경재 시점을 선택한 이유는 처음부터 당연히 경재여야만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가장 무난한 가정 환경과 영화적 설정을 갖고 있지 않나. 치호는 너무 안 어울리고 동우도 나름의 고단한 드라마가 있으니까.

Q. '스물'은 영화의 형식보다 내러티브로 서사를 전개하는 방식이 돋보인다. 그런 연출 방식을 선호하는 편인지.

A. 선호한다기 보다는 이번 장르에서 더욱 그랬던 것 같다. 스무살의 고민도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놀고 수다 떠는 것 같은 느낌의 이야기를 하고 싶기도 했다. 전형적인 플롯 말고 자유롭게 멍석을 깔고 캐릭터 플레이로 한 번 놀아보자, 수다를 떨어보자라는 작정을 한 것 같다. 내가 놀고자 하는 멍석을 내 식 대로 깔고 싶었던 게 컸는데 제작사와 투자사도 많은 고민을 했을 거다. 초고가 만들어졌던 10년 전만해도 정서적으로 받아들일까 말까 하는 때였으니까.

Q. 영화 초반에 세 친구가 길 위에서 고민을 하는 장면이 있었다. CG로 그런 장면을 표현한 점이 독특했다. 시나리오 단계에서부터 그런 그림을 연상했던 건가.

A. 그렇다. 시나리오 단계에서부터 그렇게 쉽게 접근하려고 했다. 단순하게 길이 떠올랐다. 결국 한 발자국도 못 나가고 술먹고 자빠지게 되지만. (웃음)

Q. 세 인물들 중 다소 현실감이 묻어나는 동우나 경재보다는 치호라는 캐릭터가 매력적이더라. 그런 캐릭터를 만들게 된 발단이 뭐였나. 치호가 영화감독을 꿈꾸기까지의 과정이 특수적이기도 하다. 여배우와의 이야기 설정도 드라마틱하던데.

A. 친구들끼리 무리를 지어서 놀다보면 한 놈 정도는 인기 많은, 그런 놈이 있지 않나. 그런 친구를 떠올렸다. 치호가 감독을 꿈꾸게 되는 건 어떻게 보면 이 영화에서 가장 작위적인 부분이다. 그런데 나 역시 영화감독을 하게 된 계기가 우연인 부분이 있다. 그래서일까. 내게는 작위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 여배우를 통해 치호에게 상처를 주고 싶었다. 영화적으로 가미된 부분이 없지 않아 있다. 그 여배우는 오로지 치호를 위해 만들어진 캐릭터였다.

이병헌 감독이 최근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진행된 인터뷰에서 영화 '스물' 속 클라이맥스인 소소반점 시퀀스 촬영 비화를 들려줬다. ⓒ News1 스포츠 / 권현진 기자

Q. 이병헌 감독이 연출한 두 작품만 놓고 보면 여자 캐릭터들이 다소 강하다는 느낌이다.

A. 여자 캐릭터들이 왜 전부 무섭냐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여자 캐릭터를 만든다는 게 아직 어려운 것 같다. 이번 작품에 여자 캐릭터들도 남자 애들 세 명에 맞춰서 만든 캐릭터다. 안 그래도 만들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는데 맞춰서 만들다 보니 더 어려웠다. 여자 캐릭터를 이해하고 만들고 활용하는 법이 아직은 어렵다.

Q. 세 캐릭터들 만큼이나 가장 인상 깊었던 캐릭터는 박혁권이 연기한 영화감독이었다. 영화감독의 '영화감독 하지마, 어려워, 힘들어'라는 대사들에 관객들도 폭소하더라. 이병헌 감독 본인 스스로가 하고 싶었던 말인가.

A. 내 마음이기도 하지만 지금이 아닌 나중에 내 모습이 그럴 것 같아서 쓰게 된 대사였다. 아직은 그렇게 나른하진 않다. (웃음) 영화감독을 진짜 하지 말라는 얘기는 아니다. 통달할 수 없는 기성세대의 나른함과 그간의 세월이 느껴지는 무기력함을 반어법 형식으로 그려내고 싶었지. 그런 시니컬한 모습, 넘어지는 모습을 보고 치호는 멋있다고 하는 거고. (웃음)

Q. 영화감독을 하고 싶다는 치호에게 대학에 안 가도 된다고 말하는 대사가 있었다. 감독은 누구나 될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A. 기득권에 대한 불만이기도 한데 그런 말이 치호 같은 녀석들에게 힘이 돼 주는 말이 아니었을까. 극 중 감독의 캐릭터라면 할 수 있었던 말이기도 하다.

Q. 전작과 '스물'의 뜬금 없는 전개 방식은 기존 플롯의 틀과는 확연히 다르다. 상업적으로 통용되는 방식을 넘어서고 싶은 이병헌 감독의 의지인가.

A. 나도 나중엔 전형적인 플롯의 영화를 만들 거다. (웃음) 본래 자극적이고 특수한 소재를 찾지 않는다. 근처에 있는 걸 찾는 편인데 진부할 수 있지만 더 재미있게 풀 수 있는 방법을 찾을 뿐이다. 전형적인 플롯을 쓰더라도 대신 재미있게 쓰고 싶다는 생각이다.

Q. 동우의 이야기도 그렇지만 그외의 각 에피소드들이 웃기고 슬픈데 진지하고 심각한 순간도 웃음으로 승화되는 것도 '스물'만의 매력이다. 그리고 분명 청춘을 예찬하는데 냉소적인 시각도 보이고.

A. 이 역시 내 성향이다. 동우 캐릭터는 최규석 작가의 '울기엔 좀 애매한'의 판권을 사서 각색했는데 참 울기엔 좀 애매한 그 정서와 표현이 너무 좋았다. 그래서 판권도 아예 사서 대사도 활용했다. 내가 쓰는 화법이 따뜻하고 다정한 스타일은 아닌 것 같다. 그게 더 하고 싶어하는 이야기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 같다는 생각이다.

이병헌 감독이 최근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진행된 인터뷰에서 영화 '스물' 속 박혁권이 맡은 영화감독 캐릭터에 대한 생각을 밝혔다. ⓒ News1 스포츠 / 권현진 기자

Q. 코미디 장르라면 순발력도 요구되는데 시나리오 외의 순간적인 애드리브도 잘 수용해주는 편이었나.

A. 일단 해보도록 놔두고 결정하는 편이었다. 배우들이 충동적으로 애드리브를 할 때도 있지만 전체적인 리듬을 봐야 하니까 미리 의논하고 했던 편이었다. 의견 교환에서는 귀를 많이 열어두는 편이다.

Q. 코미디 장르에다 캐릭터 플레이 위주로 가다보면 에피소드가 산만해질 수 있기 마련인데 그런 폐단이 없었다. 세 캐릭터를 균형 있게 풀어간다는 점도 인상적이었다.

A. 많이 노력하고 고민했던 부분이기도 하다. 솔직히 지금도 산만한 감이 없지 않아 있는 것 같다. 대사의 양을 똑같이 맞추려던 건 아니었지만 밸런스를 많이 염두에 두고 고민했다. 치호 캐릭터로 많이 치우칠 수도 있을 것 같았지만 동우와 경재까지 누구 하나 튀지 않고 골고루 이야기를 이끌어간다는 느낌이었으면 했다.

Q. 치호가 영화 '아비정전' 속 장국영의 맘보 춤을 춘 이유는 무엇인가.

A. '아비정전'은 중학교 때 좋아했던 영화였는데 당시 장국영에 꽂혀 있었다. 영화를 많이 보지 않던 치호가 영화에 호기심을 갖고 있다는 걸 보여줘야 하는데 장국영에 빠졌던 내 모습이 떠오르더라. 김우빈이 맘보 춤을 춘다면 중화권 팬들에게 서비스가 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기도 했고. (웃음)

Q. 왕가위 감독을 좋아하나.

A. 몇몇 꽂힌 작품이 있다. 영화 '화양연화'와 '아비정전'이 꽂히는 영화였다.

Q. 요즘 눈여겨 보거나 영향을 받는 감독은.

A. 매튜 본. (웃음) 사실 난 블록버스터에 관심이 없다. 때려 부수는 거에 아무런 재미를 느끼지 못한다. '어벤져스'나 '트랜스포머'도 관심 밖이다. '스파이더 맨'은 보지도 않았다. '킹스맨 : 시크릿 에이전트'는 조조로 보러 갔다가 환장하면서 봤다. 하하.

Q. 그 환장한 지점이 어디였나.

A. 뻔하지 않은 플롯에서 느껴지는 쾌감이 좋았다.

이병헌 감독이 최근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진행된 인터뷰에서 앞으로 어떤 감독이 되고 싶냐는 질문에 "다작을 하는 감독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 News1 스포츠 / 권현진 기자

Q. 소소반점 시퀀스도 뻔하지 않은 플롯에서 느낄 수 있는 쾌감을 주던데. 에어서플라이(Air Supply)의 '위드아웃 유(Without You)'와 배우들의 모션 싱크로율이 너무 잘 맞아서 놀라웠다.

A. 스물에 더 머물고 싶지만 물리적으로 나갈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몸부림을 치는 모습을 그리고 싶었다. 선곡도 사실 처음에 80년대 팝으로 네 곡 정도를 했는데 비용 때문에 양심껏 두 곡을 뺐다. 그 시절의 음악을 선택한 이유는 이 영화가 20대를 타깃으로 하는 영화라고 볼 수 있지만 30, 40대 그 이상에게도 추억이 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 장면은 시나리오 단계부터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속 촬영부터 음악, 액션 등을 전부 계산을 하고 촬영했다.

Q. 앞으로 시도하는 장르도 코미디가 될까.

A. 이번에는 내 마음대로 재미있게 놀았으니까 본래 진짜 하고 싶었던 상업 영화를 해야 할 것 같다. 그래도 장난 칠 수 있는 가벼운 장르를 선택하지 않을까 싶다. 스릴러나 호러 장르 같은 잔인한 장면이 많은 영화는 피곤해서 못 할 것 같다. (웃음)

Q. 후속으로 '서른'을 기대하는 관객들도 적지 않다.

A. 현장에서 농담처럼 나왔던 말인데 결과를 보고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사실 나한테는 '힘내세요, 병헌씨'가 '서른' 같은 작품이다. 현실적인 그림이 많고 '스물' 보다 훨씬 냉소적이었다. 그래서인지 치호의 10년 후를 만들어서 굳이 환상을 깨뜨리고 싶진 않긴 하다.

Q. 어떤 감독이 되고 싶나.

A. 다작 감독? (웃음)

Q. 다작 감독이라니.

A. 걸작에 대한 욕심 보다는 이야기 하고 싶은 게 많다. 그래서 다작을 하고 싶다.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할지 모르겠지만 일년에 한 편 씩은 꼭 하고 싶다는 게 바람이다.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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