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발 뗀 대미투자…전문가 "알래스카LNG, 맞대응보다 시간 두고 검증해야"
엔시날로 큰 걸림돌 제거…후속 사업 리스크 관리가 관건
"정보 비대칭 심각…사업성 검증할 자료부터 요구해야"
- 전민 기자, 이정현 기자, 김승준 기자, 심서현 기자
(세종=뉴스1) 전민 이정현 김승준 심서현 기자 =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한국의 알래스카 액화천연가스(LNG) 사업 투자 규모를 540억 달러로 못박아 발표한 데 대해 전문가들은 정부가 미국 측 발표를 적극 반박하거나 투자 결정을 서두르기보다 시간을 두고 상업적 합리성을 철저히 검증하며 협상력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한미 합의문에는 알래스카 LNG 사업이 '검토 착수' 단계로 명시돼 있어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만으로 한국의 투자 결정이 확정되는 것은 아닌 만큼, 미국 측에 사업 관련 정보를 요구하며 충분히 따져볼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반면 1호 사업인 엔시날 가스복합화력발전소 건설이 확정되면서 대미투자의 큰 걸림돌이었던 투자 구조와 원리금 회수 문제는 일단 고비를 넘겼다는 평가가 나온다. 전문가들은 향후 원전과 LNG 등 후속 사업에서 위험을 얼마나 통제하느냐가 관건이라며, 이번에 마련된 투자 한도와 리스크 분산 장치를 바탕으로 사업별 위험 분담 조건을 얼마나 구체적으로 확보하느냐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정부가 1일 발표한 한미 전략적 투자 프로젝트 추진계획에서 알래스카 LNG 사업은 상업적 합리성과 국내법상 요건 충족을 조건으로 검토에 착수하는 단계로 분류됐다.
반면 트럼프 대통령은 9월 30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한국의 투자에 540억 달러 규모의 알래스카 LNG 사업이 포함됐다고 밝혔다. 발표 현장에는 11월 중간선거를 앞둔 댄 설리번(공화·알래스카주) 상원의원 등이 배석했다.
전문가들은 이번 발표를 중간선거용으로 보면서 한국을 구속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강인수 숙명여대 경제학과 교수는 "중요한 건 말이 아니라 합의된 내용을 문서화한 것인데, 문서화된 내용에는 540억 달러를 알래스카 LNG에 투자한다는 얘기가 없다"고 말했다.
다만 완전한 일방 발표로만 보기는 어렵다는 해석도 있다. 김태황 명지대 국제통상학과 교수는 "국회 보고(9월 22일) 이후 8일 정도 사이에 양국 간 추가 논의가 있지 않았을까 싶다"며 "확정적이지는 않더라도 미국이 발표해도 되겠다고 판단할 정도의 무언가는 있었을 것"이라고 봤다.
이어 "11개월 넘게 협상하면서 이런 사업이 끼어들도록 한 것은 정부가 비판받을 수밖에 없는 부분"이라고 지적했다.
사업성에 대한 우려는 컸다. 송영관 한국개발연구원(KDI) 선임연구위원은 "미국 오일 메이저들이 이미 그 사업에서 다 빠졌다"며 "밑 빠진 독이 될 가능성이 크고, 한번 투자하면 매몰비용 때문에 빠져나오기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 교수도 "추진하게 되면 공사비가 틀림없이 지금보다 한 배는 더 들어갈 것"이라고 내다봤다.
대응 방식으로는 공개 반박보다 시간을 벌며 검증을 요구해야 한다는 조언이 많았다. 강 교수는 "정부가 나서서 트럼프 대통령 말이 틀렸다고 할 필요는 없다"며 "상업적 타당성을 검증할 수 있도록 미국이 가진 정보를 공유해 달라고 요구해야 한다"고 했다. 김 교수도 "중간선거 이후까지 시간을 끌면서 양국이 합동 경제성 분석팀을 만들어 먼저 분석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송 위원은 "행정부 혼자 강경하게 대응하기는 힘들 것"이라며 "국회에서 여야가 정쟁으로 삼지 말고 같은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불가피하게 참여하더라도 위험을 보전받을 조건은 챙겨야 한다는 조언도 나왔다. 김 교수는 "일본을 사업에 끌어들여 위험을 나누거나, 가스가 생산되면 한국에 LNG를 낮은 가격에 공급하도록 하는 협상을 할 수 있다"며 "배관이나 밸브, 펌프 같은 플랜트 기자재를 우리 기업이 공급하는 방안도 아직 얘기가 안 됐다"고 말했다.
1호 사업인 엔시날 발전소는 총사업비 223억 달러, 약 6.3기가와트(GW) 규모로 1.4GW 가스터빈 발전소를 먼저 건설한 뒤 4.9GW 규모 설비를 단계적으로 확대하는 방식이다. 정부는 20년간 최대 454억 달러가량을 회수할 수 있어 원리금 회수가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이와 관련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원리금을 어떻게 확보할 수 있느냐는 리스크 풀링"이라며 "MOU 체결 당시엔 두루뭉술하게 담겼던 내용을 이번에 구체화했다"고 말했다.
이어 "한 프로젝트가 5대 5로 원리금을 회수하더라도 전체 투자금 회수가 끝날 때까지는 1대 9로 넘어가지 않는다는 점을 명확히 했다"고 설명했다.
일부 프로젝트의 수익이 기대에 못 미칠 경우 다른 프로젝트의 5대 5 배분 기간이 그만큼 연장돼, 한국의 원리금 회수 안정성을 높일 수 있다는 게 정부 설명이다.
정부가 첫 사업으로 엔시날을 선택한 배경에는 텍사스의 전력시장 여건과 AI 데이터센터 확산에 따른 전력 수요 증가도 자리 잡고 있다. 발전업계에서는 텍사스가 천연가스 생산량이 많은 데다 미국의 대표적인 가스 가격지표인 헨리허브와 가까워 연료 조달 측면에서 경쟁력을 갖춘 것으로 평가한다. 여기에 AI 데이터센터 확대로 전력 수요가 빠르게 늘고 있어 대규모 발전사업의 수요 기반도 비교적 탄탄하다는 분석이다.
특히 엔시날 사업의 수익성은 향후 장기 전력구매계약(PPA)을 통해 얼마나 안정적인 전력 판매처를 확보하느냐에 달렸다는 게 발전업계의 설명이다. 실제 정부가 제시한 20년간 최대 454억 달러의 회수 전망도 데이터센터 등 대규모 수요처에 대한 전력 판매가 계획대로 이뤄진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미국 현지 사정에 밝은 발전업계 한 관계자는 "텍사스는 연료 도입 편의성과 가격 경쟁력이 상당히 높은 지역이고, AI 데이터센터가 빠르게 들어서면서 전력 수요가 증가하고 있다는 점도 발전사업 측면에서는 매력적인 요소"라고 말했다.
다만 "발전소 자체의 경쟁력과 실제 투자수익은 별개의 문제"라며 "가스 가격과 전력가격, 발전소 이용률, 금융비용뿐 아니라 장기 PPA 확보 여부가 실제 현금흐름을 좌우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앞서 텍사스에서는 데이터센터의 신규 전력망 연결 승인이 잠정 중단되는 등 전력수요 확대를 둘러싼 변수도 나타났다. 결국 AI 데이터센터의 예상 수요가 실제 발전소의 안정적인 전력 판매로 연결되는지가 엔시날 사업의 상업적 합리성을 판단할 핵심 변수가 될 전망이다.
이번 대미 투자 전체 구조에 대한 긍정 평가도 나온다. 장상식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장은 이번 합의에 대해 "한미 간 경제·산업 분야의 경색된 부분을 푸는 데 크게 기여할 것"이라며 "가장 큰 걸림돌이 일단 제거된 것으로 본다"고 평가했다.
특히 반도체 등 후속 산업에 대해서는 협상력을 높일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봤다. 그는 "미국 내 반도체 투자 여건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 투자를 미루거나 하더라도 우리의 요구 조건을 더 관철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며 "인력·용수·전력 지원과 생산 물량에 대한 일정 수준의 판매 예측 등 기업의 예측 가능성을 높이는 조건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다만 '상업적 합리성'에 대해서는 별도의 검증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왔다.
익명을 요구한 한 전문가는 "통상적인 투자는 사업성이 있는지를 먼저 따져본 뒤 투자 규모를 정하는 것이 순서인데, 지금 대미 투자는 투자액을 먼저 정해놓고 사업을 찾는 구조여서 순서가 뒤바뀌어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투자금은 우리가 부담하면서 수익을 나눠야 한다면 투자자가 기대하는 수익률보다 훨씬 높은 수익성이 보장돼야 한다"며 "미국이 그런 사업을 우리와 나눌 것인지도 생각해 봐야 한다"고 말했다.
다만 그는 "첫 단추가 이런 구조로 끼워진 상황에서 무조건 하지 않겠다고 할 경우 우리가 감당해야 할 피해가 무엇인지도 함께 따져야 한다"며 현재 협상이 통상·산업적 현실 속에서 이뤄지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정부가 마련한 후속 투자 구조에는 당초 협상 과정에서 우려했던 투자 위험을 제한하기 위한 장치들이 포함됐다.
통상당국이 향후 추진할 후속 사업과 관련해 우선 연간 200억 달러, 총 2000억 달러의 투자 한도를 법적 구속력이 있는 운영계약에 명시하는 방안을 추진키로 했다. 정부는 총투자액이 한도를 넘어설 경우 추가 투자를 진행하지 않겠다는 입장도 재확인했다.
원전 사업은 최대 8기 건설에 1200억 달러를 활용하는 방안이 검토된다. 여기에는 건설비 1000억 달러와 예비비 200억 달러가 포함되며, 예비비가 실제 집행되지 않더라도 투자 한도에는 포함하는 구조다. 또 2기당 300억 달러를 넘는 추가 비용은 한미 전략투자 기금에서 추가 부담하지 않는 방식으로 위험을 제한했다.
프로젝트 간 위험을 분산하는 '리스크 풀링' 구조도 핵심이다. 하나의 우산형 투자목적회사(I-SPV)가 여러 프로젝트의 자금 조달과 수익 배분을 통합 관리하고, 한국이 투자 원리금을 회수할 때까지 개별 사업의 수익을 한미가 5대 5로 나누는 구조가 검토됐다.
상업적 합리성 원칙도 유지된다. 엔시날 사업은 데이터센터 전력 수요와 예상 전력가격, 참여 기업의 역량 등을 토대로 사업성을 검토한 뒤 추진 여부가 결정됐다. 반면 알래스카 LNG는 아직 구체적인 투자가 확정된 단계가 아니다. 사업성 및 국내법상 조건을 충족할 경우에만 추진한다는 원칙이다. 국회에서도 알래스카 LNG는 아직 상업성을 판단하기 이르다는 평가가 나온 것으로 전해졌다.
한국 기업의 참여 기회도 투자 조건에 포함됐다. 엔시날 사업에서는 발전 기자재와 설계·시공, 운영·정비 등 전 과정에서 국내 기업의 참여 확대가 추진된다. 원전 사업에서는 한국형 APR1400 2기와 미국형 AP1000 6기를 포함하는 방안이 논의되고 있으며, 웨스팅하우스 지분 투자 역시 5~10% 수준에서 협상이 진행 중이다.
전문가들은 결국 후속 사업에서 실제 안전장치가 작동하는지를 지켜봐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장 원장은 "미국의 요구와 상업적 합리성을 잘 충족한, 모범 답안에 가까운 답을 냈다"고 평가하면서도 "실제 진행하다 보면 미국 측의 요구가 다시 커질 수 있다"고 말했다.
결국 대미 투자 협상의 성패는 2000억 달러라는 숫자보다 사업별 수익성과 위험을 실제로 한국 측이 통제할 수 있느냐, 그리고 엔시날·원전·LNG를 계기로 한국 기업의 미국 시장 진출과 수주를 얼마나 확보하느냐에 달렸다는 분석이다.
min785@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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