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란은행의 경고 "AI 생산성 효과 늦으면 물가·금리 상승 압력"

생산성 효과 나타나기 전 소비·투자 확대…물가 상승 압력
한국은 반도체 수출·자본유출 따른 환율 움직임도 변수

(사진은 기사 내용과 무관함) ⓒ 뉴스1 장은지 기자

(세종=뉴스1) 심서현 기자 = 인공지능(AI) 등 기술혁신으로 생산성이 높아져도 그 효과가 경제 전반에 서서히 나타날 경우 소비와 투자가 먼저 늘면서 오히려 물가와 금리를 끌어올릴 수 있다는 영란은행의 분석이 나왔다.

생산성 향상이 실제 공급 확대로 이어지기 전에 미래 소득과 수익 증가에 대한 기대가 먼저 커지면 수요가 공급을 앞서면서 물가 상승 압력이 나타나고, 이를 억제하기 위해 중앙은행의 긴축 대응이 필요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전문가들은 한국의 경우 AI 수요가 반도체 수출과 투자를 끌어올리는 효과가 큰 만큼 이 같은 경로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진단했다. 다만 수출 호조에 따른 환율과 수입물가 경로가 동시에 작용할 수 있어 AI 붐이 국내 물가와 금리에 미치는 영향은 보다 복합적일 것으로 봤다.

AI 생산성 천천히 오르면 물가·금리 상승…소비·투자 선행

31일 영국 중앙은행인 영란은행이 최근 공개한 '생산성과 인플레이션 역학'(Staff Working Paper 'Productivity and inflation dynamics') 보고서에 따르면 연구진은 생산성 향상이 물가와 금리에 미치는 영향을 충격의 지속 기간과 속도, 생산성이 개선되는 부문 등에 따라 나눠 분석했다.

분석 결과 장기적으로 생산성이 10% 높아지는 경우라도 효과가 즉각 나타날 때와 점진적으로 나타날 때 물가와 금리 반응은 엇갈렸다.

생산성 개선이 즉시 현실화하면 공급 확대가 수요 증가를 앞서면서 물가가 하락했다. 반면 생산성이 서서히 높아지는 경우에는 가계와 기업이 미래 소득과 투자수익 증가를 예상해 소비와 투자를 먼저 늘렸다.

실제 생산능력이 충분히 확대되기 전에 수요가 먼저 커지면서 소비자물가(CPI)와 자연실질금리는 함께 상승했다. 생산성 향상이 장기적으로 경제의 공급능력을 높이더라도 그 효과가 나타나기까지의 과정에서는 오히려 인플레이션 압력이 커질 수 있다는 것이다.

금리 반응 역시 생산성 향상의 형태에 따라 달랐다. 일시적인 생산성 상승은 물가와 자연실질금리를 낮췄지만 생산성 증가세가 장기간 이어질 것으로 예상되면 현재 소비와 투자가 확대되면서 자연실질금리는 높아졌다.

자연실질금리가 오른 상태에서 중앙은행이 정책금리를 그대로 유지하면 통화정책은 상대적으로 완화적으로 작용한다. 연구진은 이 경우 인플레이션을 억제하려면 정책금리를 높이는 긴축 대응이 필요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AI와 같은 범용기술은 실제 생산성 향상이 나타나기까지 기업의 조직 개편과 보완투자, 인력 재배치, 산업 전반으로의 확산 등에 시간이 걸릴 수 있다. 생산성 효과보다 기대가 먼저 형성되면 소비와 투자 등 수요가 선행하면서 단기적으로 물가와 금리를 밀어 올릴 수 있다는 설명이다.

영란은행의 전경 ⓒ 로이터=뉴스1
AI 투자 급증·반도체 품귀도 물가 자극…서비스 가격까지 번질 수도

전문가들은 실제 경제에서도 AI가 생산성을 높여 물가를 낮추는 효과가 아직 뚜렷하게 확인되지 않은 반면 AI 투자 확대에 따른 수요 압력은 이미 나타나고 있다고 평가했다.

양준석 가톨릭대 경제학과 교수는 "지금 당장은 AI 때문에 생산성이 늘어난다는 증거가 별로 없고, 생산성이 늘고 있더라도 이것이 AI 때문이라는 근거는 없는 상태"라며 "AI가 성장을 이끌고 있는 것은 맞지만 현재는 AI 분야에서 오히려 물품과 자원의 품귀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양 교수는 메모리 반도체와 엔비디아 GPU, 전력 등을 대표적인 사례로 들었다. 그는 "메모리 반도체는 1~2년 전부터 품귀 현상이 시작됐고 엔비디아 GPU도 가격이 많이 올랐다"며 "AI 데이터센터 증가로 전력 가격도 올라가고 있다는 분석이 상당히 많은 만큼 AI 부문에서는 인플레이션이 올라가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대규모 AI 투자를 위한 자금 수요 자체가 금리를 끌어올릴 수 있다는 분석도 제기했다. 양 교수는 "AI에 투자하는 회사들이 지난해까지는 자체 이익으로 투자를 했지만 최근에는 돈을 엄청나게 많이 빌리기 시작했다"며 AI 투자 확대에 따른 자금 수요가 금리 상승의 한 요인이 될 수 있다는 해석에 "상당 부분 맞을 것"이라고 말했다.

제조업의 생산성 향상이 서비스물가 상승으로 이어지는 경로도 있다. 제조업 생산성이 빠르게 높아져 임금이 오르면 상대적으로 생산성을 크게 높이기 어려운 서비스업도 인력을 유지하기 위해 임금을 따라 올려야 하고, 이는 서비스 가격 상승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양 교수는 "AI 등 신기술이 등장하면 공산품 제조업의 생산성은 비약적으로 올라가지만 이발과 같은 서비스재는 생산성을 그만큼 높일 수 없다"며 "서비스업에 사람이 계속 있으려면 공장에서 버는 만큼 임금이 올라가야 하고 결국 서비스 가격이 올라가면서 인플레이션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영란은행 연구진도 생산성이 어느 부문에서 높아지느냐에 따라 물가 경로가 달라진다고 분석했다. 비교역재 생산성이 즉각 높아지는 경우에는 공급 확대에 따른 가격 하락 효과가 컸지만 생산성 개선이 점진적으로 이뤄질 경우 미래 소득 증가 기대가 소비와 투자를 끌어올려 전체 물가가 상승할 수 있었다.

한국은행 (한국은행 제공) ⓒ 뉴스1 신웅수 기자
반도체 수출국 한국은 수요·환율 동시 작용…한은 금리 판단도 복잡

반면 교역재 부문에서는 환율이 물가 방향을 가르는 주요 경로로 나타났다. 교역재 생산성이 점진적으로 높아질 것으로 예상되면 통화가치가 실제 생산성 향상에 앞서 상승하고, 이에 따라 수입품 가격이 내려 전체 소비자물가를 낮추는 것으로 분석됐다. 수입물가 하락 효과가 국내 수요 증가에 따른 비교역재 물가 상승을 웃돌았기 때문이다.

반도체를 중심으로 교역재 수출 비중이 큰 한국에서도 이 같은 환율 경로가 중요하게 작용할 수 있다. 다만 반도체 수출 증가가 기업 투자와 소득을 늘려 국내 수요를 자극하는 효과와, 원화 강세를 통해 수입물가를 낮추는 효과가 동시에 나타날 수 있다.

김정식 연세대 경제학부 명예교수는 현재 국내에서 나타나는 AI 효과는 생산성 향상에 따른 물가 하락보다 반도체 수출 증가에 따른 수요 확대 측면이 더 크다고 진단했다.

김 교수는 "삼성전자 등이 혜택을 보는 것은 AI의 생산성 증가라기보다 AI로 인한 반도체 수출 증가 때문이라고 봐야 한다"며 "생산성 향상이 물가 상승을 희석시키는 요인은 있지만 성장률이 높아지면 소비 등 수요 요인에 의해 물가가 높아지는 부분도 있다"고 말했다.

이어 "물가 상승 요인은 상당히 내재돼 있다고 볼 수 있다"며 "피지컬 AI가 앞으로 활성화되면 생산성 효과가 커질 수 있지만 현재는 AI가 생산성에 미치는 영향이 그렇게 크지 않다"고 설명했다.

AI가 생산비를 낮추는 효과가 나타나더라도 원자재와 임금 등 다른 비용 상승 요인이 이를 상쇄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 김 교수는 "아무리 AI가 생산성을 높여 생산 원가가 낮아지더라도 원유나 원자재 가격, 임금 상승 등 원가를 높이는 요인이 있다"며 "현재로서는 물가가 낮아져 금리 인하 요인이 커졌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AI와 반도체 호황이 이어질 경우 한국은행의 금리 판단에서도 물가 상방 위험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생산성 향상에 따른 공급 확대보다 반도체 수출과 투자, 소비 증가에 따른 수요 확대가 먼저 나타날 경우 금리 인하 여력이 제한될 수 있기 때문이다.

환율 역시 물가와 금리를 결정할 변수다. 수출 증가로 원화가 강세를 보이면 수입물가를 낮출 수 있지만, 자본유출이 동시에 나타나 원화 강세가 제한될 경우 이 같은 물가 하락 효과도 약해질 수 있다.

김 교수는 "경상수지 흑자로 돈이 많이 들어오면 통상 환율은 내려가게 돼 있지만 자본시장에서 그만큼 돈이 빠져나가면 그렇게 되지 않는다"며 "환율도 불안하고 물가도 불안하면 금리도 높아질 수 있다"고 말했다.

영란은행 연구진 역시 생산성 향상이 항상 물가를 낮추거나 높이는 한 방향의 충격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생산성 개선의 속도와 발생 부문, 수요 확대 정도와 환율, 통화정책 대응에 따라 물가와 금리의 방향이 달라질 수 있다는 설명이다.

seohyun.shim@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