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가 이끈 기록적 경상흑자…커지는 '수출-내수 온도차'
수출 5.1%·설비투자 4.8% 늘 때 민간소비는 겨우 0.5%
CEPR "과도한 흑자는 내수 부족 결과"…美, 대미투자 압박 우려
- 심서현 기자
(세종=뉴스1) 심서현 기자 = 우리나라의 경상수지 흑자가 반도체 수출에 힘입어 올해 들어 5개월 만에 지난해 연간 규모를 넘어섰지만 소비심리 위축과 내수 부진이 이어지면서 경기 회복의 불균형이 심화하고 있다.
수출 호조가 소비와 산업 전반의 투자 회복으로 충분히 확산하지 못하는 가운데, 대규모 경상흑자가 장기화할 경우 국내외 경제 불균형이 함께 확대될 수 있다는 해외 연구기관의 경고도 나온다.
전문가들은 반도체 수출이 만든 기록적인 흑자를 국내 소비와 투자, 다른 산업의 성장으로 확산하지 못할 경우 대외 통상 압박과 산업간 성장 격차가 동시에 커질 수 있다고 지적한다.
19일 한국은행 경제통계시스템(ECOS)에 따르면 올해 1~5월 누적 경상수지 흑자는 1413억 달러로, 지난해 연간 흑자 1230억 달러를 이미 넘어섰다.
올해 경상수지 흑자 확대는 반도체를 중심으로 한 상품수지 개선이 주도했다.
수출 호조에 힘입어 올해 한국의 GDP 대비 경상수지 흑자 비율도 이례적으로 높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해외 투자은행 8곳이 지난 3월 말 제시한 올해 한국의 GDP 대비 경상수지 흑자 비율은 평균 8.2%였다. 일부 기관은 10%를 웃돌 것으로 전망했다.
이후 반도체 수출과 경상수지 흑자 규모가 기존 예상치를 계속 웃돌면서 연간 흑자 규모와 GDP 대비 비율 역시 추가 상향될 가능성이 커졌다.
경상수지 흑자는 통상 수출 경쟁력과 대외건전성을 보여주는 지표로 평가된다. 원화 가치와 국가신용도 방어에도 긍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한다.
다만 흑자 규모가 지나치게 커질 경우 국내에서 소비하거나 투자하지 않은 소득이 해외자산으로 축적된 결과로도 해석할 수 있다. 한 나라의 경상수지 흑자는 국민경제 전체의 저축이 투자보다 많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올해 1분기 성장률을 끌어올린 것은 수출과 설비투자였다.
실질 GDP가 전기 대비 1.8% 증가한 가운데 수출은 반도체 등을 중심으로 5.1% 늘었다. 설비투자도 반도체 제조용 장비와 운송장비 투자가 확대되면서 4.8% 증가했다.
반면 민간소비 증가율은 0.5%에 머물렀다. 수출기업과 제조업 투자를 중심으로 경제 전체의 성장세가 확대됐지만, 가계가 체감하는 소비 회복은 상대적으로 더뎠던 셈이다.
가계는 소비지출이 처분가능소득보다 더 빠르게 늘었다.
국가데이터처의 올해 1분기 가계동향조사 결과 가구당 월평균 처분가능소득은 434만 4000원으로 전년 동기보다 2.7% 증가했다. 같은 기간 소비지출은 310만 5000원으로 5.3% 늘었다.
소비지출 증가율이 처분가능소득 증가율을 웃돌면서 가구당 월평균 흑자액은 123만 9000원으로 3.1% 감소했다.
소비 자체는 증가했지만 가계의 소득 증가만으로 이를 충분히 뒷받침하지 못하면서 남는 돈은 줄어든 것이다.
유럽경제정책연구센터(CEPR)는 최근 발간한 '세계 경제 불균형' 보고서에서 대규모 경상수지 흑자를 지속하는 국가도 세계 경제 불균형에 책임이 있다고 분석했다.
흑자국이 국내 소비와 투자를 충분히 늘리지 않을 경우 남은 저축은 해외로 흘러가는데, 이 자금은 적자국의 정부·가계·기업 차입을 뒷받침하고 자산 가격 상승과 금융 불균형을 키울 수 있다는 것이다.
CEPR은 흑자국의 내수 부진과 적자국의 과잉 차입이 서로 맞물려 있기 때문에 관세나 환율 조정만으로는 불균형을 해소하기 어렵다고도 지적했다.
특히 흑자국이 재정지출과 임금, 사회안전망 강화 등을 통해 국내 수요를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봤다. 수출과 해외 수요에 지나치게 의존할 경우 적자국의 무역갈등과 보호주의를 자극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보고서가 한국을 직접 분석한 것은 아니지만, 기록적인 경상수지 흑자와 수출·소비 간 성장 격차가 동시에 나타나는 한국 경제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실제로 대미 투자 확대는 지난해 한미 관세 협상의 핵심 의제였다. 미국 정부는 무역적자를 줄이고 제조업 생산 기반을 자국으로 이전하기 위해 한국을 비롯한 경상흑자국에 투자를 요구해 왔다.
한국 기업의 해외투자가 확대될 경우 수출 경쟁력은 유지되더라도 국내 설비투자와 고용, 가계소득으로 이어지는 효과는 약해진다. 경상수지 흑자가 확대되는 동시에 국내 생산 기반 일부가 해외로 이전되는 구조가 나타나면서 내실 없는 성장이 지속된다는 의미다.
전문가들은 기록적인 경상수지 흑자가 미국의 통상 압박을 키우는 동시에 국내에서는 반도체와 다른 산업 간 성장 격차를 가릴 수 있다고 지적했다.
김정식 연세대 경제학부 명예교수는 "과거에는 한국의 수출이 늘자 미국이 시장 개방을 압박했지만, 지금은 미국에 투자하라고 압박한다"고 분석했다.
대미 투자 확대가 한미 관세 협상의 핵심 의제로 다뤄진 것도 미국이 한국의 자금과 첨단 제조업 생산 기반을 자국으로 끌어들이려는 흐름과 맞닿아 있다는 설명이다.
국내에서는 반도체 수출에 집중된 성장의 과실을 소비와 투자, 다른 산업으로 확산해야 한다는 진단이 나온다.
강성진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는 "지금 경기를 주도하는 것은 반도체"라며 "반도체 수출이 좋다고 해서 다른 기업과 산업까지 좋은 것은 아니다. 국내 경기가 좋은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양준석 가톨릭대 경제학과 교수도 "반도체가 워낙 잘되기 때문에 다른 산업이 잘되지 않는 것이 묻히고 있다"며 "다른 산업의 성장 둔화를 반도체가 가리는 착시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평가했다.
양 교수는 "반도체와 연결된 사람들은 큰 혜택을 받고 있지만 그 혜택을 받는 사람은 아주 적다"며 "반도체 하나가 둔화하면 한국 경제 상황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고 덧붙였다.
권남훈 산업연구원장은 "늘어난 소득이 효율적으로 사용돼 투자로 이어지고 생산능력이 증대해야 잠재성장률이 올라갈 수 있다"며 "올해 벌어진 상황만으로 큰 구조적 반전이 일어났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수출이 늘어난 것은 우리 경제에 긍정적이지만, 그 과실을 어떻게 관리하느냐가 중요하다"며 "이를 잘 관리하면 우리 경제의 지속 가능한 도약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seohyun.shim@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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