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해도 경쟁사 못 가"…韓 근로자 '이직 제한' 체감 OECD 1위

한국 민간 근로자 48% "경업금지 약정 적용"…14개국 중 가장 높아
핵심인력 넘어 계약직·저임금·비전문직까지 확산…노동이동성 저해 우려

(사진은 기사 내용과 무관함) ⓒ 뉴스1 김성진 기자

(세종=뉴스1) 심서현 기자 = 퇴사 후 경쟁사 취업이나 동종 업종 창업을 제한하는 '경업금지 약정'에 묶였다고 인식한 한국 근로자 비율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조사 대상 14개국 중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OECD 고용전망 보고서에서 한국 민간부문 근로자의 절반 가까이가 경업금지 약정 적용 대상이라고 답했고, 핵심 기술인력뿐 아니라 계약직·저임금·비전문직까지 경업금지 약정이 적용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기업 간 임금담합이나 노포칭(상대 회사 직원 채용 제한) 관행에 대한 부정 인식도 높았다. 국내 기업의 약 65%는 같은 업계에서 노포칭, 임금담합 또는 두 관행이 이뤄지는 것을 알고 있다고 답해 조사 대상국 평균을 크게 웃돌았다. 경업금지 약정과 노동시장 담합 관행이 과도하게 이뤄질 경우 근로자의 이직 선택과 임금 경쟁을 제한하고 노동시장 경쟁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해외에서는 노동시장 담합을 경쟁법 규율 대상으로 보는 흐름이 강화되고 있다. 미국과 캐나다 등은 기업 간 임금·채용 제한 합의를 경쟁 제한 행위로 보고 규율 범위를 넓히고 있지만, 국내에서는 경업금지 약정이 주로 개별 계약과 법원 판단에 맡겨져 있으며 노동시장 담합에 대한 경쟁당국의 집행도 아직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다.

국가별 첫 실태조사서 韓 경업금지 최상위…근로자 절반 묶여

10일 OECD가 최근 공개한 '고용전망 2026' 한국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 민간부문 근로자 중 17%는 경업금지 약정 적용을 "확실히 받는다"고 답했다. 31%는 "아마 적용받는다"고 응답했다.

이를 합산한 비율은 48%로, OECD 조사대상 14개국 중 가장 높았다. 사용자 조사에서도 국내 민간 근로자의 25~35%가 경업금지 약정에 묶인 것으로 분석됐다.

OECD는 한국에서 경업금지 약정이 관리자·전문직 등 핵심 인력뿐 아니라 약정 정당화 근거가 약한 근로자에게도 확산해 있다고 지적했다.

기밀정보에 접근하지 않는 근로자 중 16~41%, 기간제 근로자 중 22~44%가 경업금지 약정을 적용받는다고 답했다. 월 200만 원 미만 저임금 근로자도 5~37%, 비관리·비전문직 근로자도 15~44%가 경업금지 약정에 묶인 것으로 조사됐다.

경업금지 조항을 쓰는 기업 중 23%는 직무나 직급과 관계없이 모든 직원에게 이를 적용한다고 응답했다.

기업 간 노동시장 제한 관행에 대한 부정 인식도 높았다. OECD 조사에서 한국 기업의 약 65%는 같은 업계에서 노포칭, 임금담합 또는 두 관행 모두가 이뤄지는 것을 알고 있다고 답했다. 조사대상국 평균은 48%였고, 한국은 일본에 이어 조사 대상 14개국 중 2위에 올랐다.

노포칭은 기업들이 서로 상대 회사 직원을 채용하지 않기로 하는 합의다. 임금담합은 기업들이 임금이나 보상 수준을 일정하게 맞추기로 하는 합의를 뜻한다.

OECD는 조사 문항의 민감성을 감안해 기업에 직접 가담 여부를 묻는 대신, 같은 업계에서 관련 관행을 알고 있는지 조사했다. OECD는 이 수치가 해당 기업들의 직접 참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노포칭·임금담합이 일부 기업의 예외적 사례에 그치지 않을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이번 조사는 OECD와 이탈리아 보코니대가 공동 설계하고 입소스가 지난해 실시했다. 근로자 조사는 민간부문 18~64세 근로자를 대상으로 한 온라인 조사 방식으로 진행됐다. 한국에서는 근로자 2016명이 응답했다. 기업 조사는 5인 이상 영리기업의 계약·인사 담당자를 대상으로 전화조사 방식으로 이뤄졌다. 한국에서는 409곳이 참여했다.

OECD는 이번 조사가 경업금지와 관련 약정의 사용 실태, 규제 수준, 임금·생산성과의 관계를 국가 간 비교한 첫 분석이라고 설명했다.

정수환 KDI 연구위원은 "한국 노동시장 맥락에서의 경업금지 약정에 대한 양적 분석은 이번 OECD 보고서가 처음"이라며 "그동안 국가 단위에서 경업금지가 얼마나 사용되고 있는지 비교할 자료가 거의 없었는데, 이번 보고서는 비교 가능한 지표를 제시했다는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미국 워싱턴DC에 위치한 연방거래위원회 ⓒ AFP=뉴스1
美·캐나다는 경쟁법 규율…한국은 직접 집행 없어

해외에서는 노동시장 담합을 경쟁법 규율 대상으로 보는 흐름이 강화되고 있다.

미국 법무부는 2010년 애플·구글 등 6개 빅테크 기업의 직원 스카우트 제한 합의를 반독점법 위반으로 보고 민사소송을 제기한 이후 해당 합의를 중단하도록 하는 방식으로 사건을 마무리했다. 이후 법무부와 연방거래위원회(FTC)는 2016년 지침을 통해 정당한 협업과 무관한 노골적인 임금담합·노포칭 합의는 형사기소 대상이 될 수 있다고 밝혔다.

지난해 내놓은 새 가이드라인에서는 임금정보 공유, 근로자 이동 제한, 교섭력 남용 등 노동자에게 영향을 미치는 사업 관행 전반을 반독점 리스크로 제시했다. FTC는 지난해 반려동물 장례업체 게이트웨이 서비스가 직원들의 경업금지 약정을 집행하지 못하도록 최종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캐나다도 2023년 경쟁법 개정 조항 시행으로 지분 관계가 없는 사용자 간 임금·근로조건 담합과 근로자 채용 제한 합의를 형사 범죄로 규율하고 있다. 캐나다 경쟁당국은 임금담합·노포칭이 가격담합처럼 경쟁을 훼손한다며, 위반 시 최장 14년 징역 또는 법원 재량 벌금이 부과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도 임금담합·노포칭 합의가 대부분 경쟁제한 목적 위반에 해당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일본 공정거래위원회도 기업 간 임금·보상 합의는 인재 확보 경쟁을 막아 경쟁법상 문제가 된다고 해석한 바 있다.

반면 국내에서는 경업금지 약정을 포괄적으로 규율하는 일반 법률이 없어 법원이 사안별로 약정의 유효성을 판단하고 있다.

서울 마포구 서울서부고용복지플러스센터 일자리정보 게시판 ⓒ 뉴스1 김성진 기자
전문가들 "노동 이동성 저해…기술보호와 균형 필요"

전문가들은 경업금지 약정이 과도하게 활용될 경우 근로자의 이직 선택지와 임금 협상력을 낮추고, 기업 간 인력 확보 경쟁과 지식 확산을 막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정 연구위원은 "경업금지 약정은 기본적으로 노동시장에서 다른 일자리로 이동하는 것을 저해하는 것"이라며 "이직이나 관련 업종 창업에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고, 경제 전체 생산성에도 부정적인 영향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경업금지가 기술을 잘 알고 있는 사람에게만 적용된다면 문제가 작을 수 있지만 OECD 보고서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널리 활용될 가능성을 제기했다"며 "많이 적용될수록 부작용이 커질 수 있다는 점에서 한국도 추가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다만 전문가들은 경업금지 약정을 무조건 없앨 문제로 보기는 어렵다고 봤다. 실제 핵심 기술이나 영업비밀을 다루는 인력이 경쟁사로 곧바로 옮길 경우 기업 피해가 생길 수 있는 만큼, 보호 필요성이 있는 직무에 한해 제한적으로 인정하되 일반 근로자에게까지 관행적으로 확대되는 것은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양준석 가톨릭대 경제학과 교수도 "경업금지는 경쟁과 지식재산권 보호라는 두 원칙이 충돌하는 문제"라며 "기술이나 영업비밀을 다루는 사람에게는 필요성이 있을 수 있지만 문제는 경업금지가 너무 심하게 쓰이고 있다는 점이다"라고 말했다.

양 교수는 "경쟁을 위해서는 사람이 이동할 수 있는 자유가 있어야 하고, 높은 기술을 가진 사람이 다른 기업으로 가거나 창업하는 것은 산업 전체의 기술 수준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며 "반대로 기업 입장에서는 기술 개발 인센티브와 영업비밀 보호 필요성도 있기 때문에 균형을 따져야 한다"고 했다.

공정위는 현재 경업금지 약정 자체를 두고 직접 집행하는 사안은 없다는 입장이다. 다만 해외에서 노동시장 담합을 경쟁법으로 다루는 논의가 확산하는 만큼 향후 국내에서도 관련 논의가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공정위 관계자는 "현재 경업금지 약정 자체를 두고 위원회가 직접 집행하고 있는 것은 없다"며 "해외 정책 동향이나 논의 동향, 데이터 등을 보면서 이 부분에 대해서도 법 집행이 필요한지 여부를 고려해 볼 여지는 있다"고 밝혔다.

seohyun.shim@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