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환율 급한 불은 껐지만…기업 손에 쥐어진 '1400원 뉴노멀' 탈출 키
서학개미·기업·은행 전방위 '달러 유입' 유도…연휴 직후 1430원대 진정
"기업이 '달러 보따리' 풀어야 1400원 아래 간다…근본 해결책은 기업환경 개선"
- 전민 기자
(세종=뉴스1) 전민 기자 = 정부가 국내로 복귀한 '서학개미'에 대한 양도소득세 감면부터 기업의 배당금 비과세, 은행의 외환 규제 완화까지 가용한 모든 카드를 쏟아부으며 달러·원 환율 1500원 저지선을 구축했다.
시장은 즉각 반응하며 급한 불은 껐지만, 전문가들은 환율이 1200원~1300원대로 복귀하기보다는 '1400원대'가 새로운 표준(뉴노멀)으로 굳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냉정한 진단을 내놨다.
구조적인 수급 불균형이 해소되지 않은 상황에서 정부 대책이 효과를 발휘하려면, 개인보다는 '기업'의 대규모 자금 환류(리쇼어링)가 필수적이며, 이를 위해선 규제완화 등 기업환경의 근본적인 개선이 선행돼야 한다는 지적이다.
28일 관계부처와 금융권에 따르면 최근 외환당국이 내놓은 대책은 단순한 '구두 개입' 수준을 넘어선 전방위적인 '달러 소환 작전'으로 요약된다. 환율이 심리적 마지노선인 1480원대를 위협하자 달러가 들어오는 길목을 막고 있던 빗장을 모두 푼 것이다.
기획재정부는 지난 24일 '국내 투자·외환 안정 세제지원 방안'을 통해 개인투자자가 해외주식을 팔고 국내 주식에 장기 투자할 경우 양도소득세를 면제해 주기로 했다. 올해 11월까지 서학개미의 해외주식 순매수액이 45조 원을 넘어서며 환율 상승의 주요인으로 지목되자, 이들을 국내로 유인해 달러 매도를 유도하겠다는 포석이다.
기업을 향해서는 '법인세법상 해외 자회사 배당금 익금불산입률 100% 상향'이라는 강력한 유인책을 제시했다. 기업이 해외에서 번 돈을 국내로 들여올 때 세금을 전혀 물리지 않겠다는 뜻으로, 과거 환율 하락기에 기업의 자금 유입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에 착안했다.
은행권의 달러 공급 숨통도 트였다. 한국은행은 지난 19일 사상 처음으로 은행이 맡긴 외화지급준비금에 이자를 지급하고, 외환 건전성 부담금을 면제해 주기로 했다. 또한 외국계 은행의 선물환 포지션 한도를 200%까지 대폭 늘려, 은행들이 해외 본점에서 달러를 더 쉽게 빌려와 국내 시장에 풀 수 있도록 규제를 완화했다.
시장은 즉각 반응했다. 대책 발표 당일인 지난 24일 환율은 하루 만에 30원 가까이 급락하며 1450원대로 내려앉았다.
성탄절 휴장 후 개장한 26일에도 달러·원 환율은 장중 1430원대 중반까지 하락세를 보이다가 주간시장에서 9.5원 내린 1440.3원으로 마감했다. 1500원 돌파라는 공포심리가 잦아들고, 정부의 강력한 안정 의지로 인해 투기적인 달러 매수세(롱 심리)가 꺾인 덕분이다.
민경원 우리은행 이코노미스트는 "당국의 고강도 대책이 환율 급락에 일조했고, 그동안 쌓였던 롱스톱(손절매) 물량이 나오며 환율이 하락하고 있다"며 "엔화와 위안화 등 아시아 통화가 동반 강세를 보이는 대외 여건도 우호적"이라고 분석했다.
하지만 시장 전문가들은 현재의 안정이 '추세적 하락'으로 이어지기는 어렵다고 입을 모은다. 정부가 1500원을 넘어서는 오버슈팅(과열)은 막았지만, 1400원대라는 높은 바닥은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정용택 IBK투자증권 수석연구위원은 "최근 불안 요인으로 야기된 부분만큼은 되돌림이 발생하겠지만, 그 폭이 크지 않을 가능성이 높고 내년에도 환율 수준에 대한 눈높이는 여전히 높게 유지할 필요가 있다"며 "대부분의 조치에 '한시적'이라는 꼬리표가 붙어 있다는 것은 근본적인 상황이나 추세를 바꾸기보다는 높아진 지금의 변동성을 관리하겠다는 의미"라고 해석했다.
이어 "한미 금리 역전 고착화와 교역 구조 변화 등 구조적 요인들이 이미 환율의 균형점을 크게 높여 놨다"며 "환율 하락 폭에 대한 과도한 기대는 경계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특히 기관의 달러 수요는 여전히 견고하다. 정부가 개인(서학개미)을 타깃으로 세금 혜택을 줬지만, 정작 시장의 큰손인 자산운용사와 보험사 등 기관투자자들은 해외 투자를 늘리고 있다.
지난 3분기 기준 자산운용사·보험사 등 주요 기관투자가의 외화증권투자 잔액은 4902억 달러로 전 분기 대비 246억 7000만 달러 증가했다. 3분기 연속으로 분기당 100억 달러가 넘는 가파른 증가세다.
이진경 신한투자증권 연구원은 "개인투자자에 대한 세제 혜택에도 불구하고 기관투자자의 외화증권투자 잔액은 증가 추세를 이어가고 있어 환율의 하방 경직성이 유지될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이런 상황에서 '뉴노멀'로 굳어져 가고 있는 1400원대 벽을 깨고 1300원대로 안착하기 위해서는 수출기업들의 래깅(달러 매도 지연) 해소 여부가 관건이 될 전망이다.
권아민 NH투자증권 연구원은 "과거 환율이 의미 있게 하락했던 시기는 정부의 정책과 맞물려 기업의 해외 자회사 배당금 유입 등 실질적인 대규모 자본 환류가 있었을 때"라고 강조했다. 정부가 '비과세'라는 판을 깔아준 만큼, 기업들이 실제로 해외에 쌓아둔 달러를 국내로 들여와야만 시장의 수급 판도가 바뀔 수 있다는 설명이다.
권 연구원은 "최근 수출 호조에도 대미 투자 불확실성 여파로 기업 달러 매도가 부재했는데, 다시 말하면 잠재 달러 매도 물량도 충분한 상황"이라며 "해외 자회사 사내 유보의 회귀 가능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근본적으로는 환율 흐름을 바꾸기 위해서는 펀더멘털 개선과 함께, 기업들이 국내로 자금을 가져오고 싶게 만드는 환경을 만들어줄 필요가 있다는 제언도 나온다.
김정식 연세대 경제학부 명예교수는 "수급 대책은 근본적으로 해외투자가 늘어나는 문제는 해결할 수 없다"며 "경제 펀더멘털의 개선과 함께 규제, 경영환경 등을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게 고치지 않는다면 자본 유출은 계속해서 늘어날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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