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금고 속 '달러' 풀린다…환율 1500원 방어 '5대 처방' 뜯어보니
외환위기 트라우마 규제 손질…은행·기업 등 달러 공급 길 열려
전문가들 "펀더멘탈 격차 여전…고환율 심리 단번에 진정 어려워"
- 이강 기자, 전민 기자
(서울=뉴스1) 이강 전민 기자 = 정부가 1480원 선을 넘나드는 고환율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18일 발표한 '외환건전성 제도 탄력적 조정 방안'의 핵심은 '달러 유입을 막던 옛날 빗장을 풀겠다'는 것이다.
과거 외환위기 트라우마로 겹겹이 쌓아 올린 규제 '방파제'가 지금은 오히려 시장의 '달러 가뭄'을 부추기는 역설적 상황을 타개하겠다는 의도다.
이번 조치의 핵심은 '규제 패러다임 전환'에 있다. 선물환 포지션 한도 규제와 외화유동성 스트레스 테스트 등은 2010년 우리나라가 만성적인 '순대외채무국'이던 시절, 단기 외채가 급격히 늘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도입된 '달러 유입 억제책'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180도 달라졌다. 대외 건전성은 양호한데, 서학개미 등 해외 투자가 급증하며 달러가 나가기만 하고 들어오지 않는 '구조적 유출'이 고환율을 부채질하고 있다. 기재부 관계자는 "과거 위기 시에는 들어오는 달러를 막는 게 최우선이었지만, 지금은 막아뒀던 빗장을 풀어 수급의 물꼬를 터줘야 한다"고 설명했다.
가장 빠르고 직접적인 효과가 기대되는 조치는 '외화유동성 스트레스 테스트' 규제의 한시적 유예다.
이는 은행이 위기 상황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를 점검하는 제도다. 다만, 기준이 엄격해 은행들이 규제 준수를 위해 필요 이상으로 달러를 금고에 쌓아두고 시장에 내놓지 않는 부작용이 있었다.
정부는 내년 6월까지 이 규제 적용을 유예함으로써, 은행들이 '혹시 몰라서 쌓아둔' 달러 유동성을 시장에 풀도록 유도한다는 계획이다.
꽉 막혀 있던 달러 공급의 '파이프라인'도 확장한다. SC제일은행과 한국씨티은행 등 외국계 은행 국내법인의 선물환 포지션 한도를 기존 75%에서 200%로 대폭 늘린 것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본점에서 달러를 차입해 올 여력이 충분함에도 그간 국내 은행과 동일한 규제에 묶여 있었다. 이번 조치로 이들이 해외에서 달러를 더 많이 들여와 국내 시장에 공급할 길이 열리게 됐다.
실물 경제 주체인 기업과 외국인 투자자에 대한 달러 유입 유인도 강화된다. 수출기업에는 그간 막혀 있던 '운전자금 용도 외화대출'을 전격 허용한다.
과거에는 금리 차이를 노려 외국에서 달러를 빌린 뒤 원화로 바꿔 사용하는 수요가 늘면서 외채만 증가한다는 우려가 커지자, 외채 관리 차원에서 이를 원칙적으로 제한해 왔다.
그러나 최근에는 과거처럼 외화차입이 자동적으로 수익으로 이어지는 구조가 아니고, 수출기업의 경우 달러 상환 능력을 감안해 규제 완화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외국인 투자자에게는 '통합계좌'(Omnibus Account)를 활성화한다. 마치 한국의 개인 투자자가 앱으로 미국 주식을 손쉽게 사듯, 외국인들도 별도 계좌 개설 없이 자국 증권사를 통해 한국 주식을 바로 살 수 있게 해 '대기자금'의 유입을 노린다는 구상이다.
정부의 이번 '5대 처방'은 달러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규제 때문에 돈이 돌지 않는 '돈맥경화'를 뚫겠다는 데 방점이 찍혀 있다.
다만 펀더멘탈(성장률·금리차) 격차가 여전한 상황에서, 미세적인 규제 완화만으로 1500원을 넘보는 고환율 심리를 얼마나 진정시킬 수 있을지가 관건이 될 전망이다.
강성진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는 이번 조치에 대해 "대외건전성은 과거와 달리 양호한 만큼 낡은 규제를 한시적으로 손질하겠다는 취지에는 공감한다"면서도 "환율 안정의 근본은 결국 내수와 산업 경쟁력 등 펀더멘탈"이라고 말했다.
석병훈 이화여대 경제학과 교수는 "환율 하락 기대가 없는 상황에서는 이번 조치의 유인이 크지 않다"고 지적했다.
석 교수는 "달러·원 환율이 중장기적으로 상승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한데, 이런 상황에서 은행이나 기업이 굳이 달러를 시장에 공급할 이유가 없다"며 "외화유동성 스트레스테스트 유예나 선물환포지션 완화, 원화용도 외화대출 허용 등은 제도적으로 통로를 열어주는 조치일 뿐, 달러를 내놓을 유인을 만들지는 못한다"고 말했다.
이어 "한국은 통화량 증가율이 미국보다 높고 성장률은 낮은 데다, 관세 협상에 따른 대미 투자 확대까지 겹치며 중장기적으로 펀더멘털이 약화하고 있다"며 "이런 여건이 바뀌지 않으면 환율 상승 압력은 계속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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