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율 1400원대 '뉴노멀'…달라진 위기공식에 당국 기류도 변화

'트리플 약세' 옛말…신용위기 아닌 '구조적 변화'
"반도체 호황에 오히려 좋다" vs "물가 부담"…1480원대 저항선 시험대

13일 오후 서울 중구 하나은행 딜링룸 현황판. 2025.11.13/뉴스1 ⓒ News1 구윤성 기자

(세종=뉴스1) 전민 기자 = 달러·원 환율이 1470원 선을 넘어서며 1500원대를 위협하고 있지만, 국내 금융시장은 과거와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환율이 1400원을 넘어서면 외국인 자금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주가가 동반 하락했던 '트리플 약세' 공식이 작동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이를 일시적 현상이 아닌, 한국 경제의 체질 개선과 구조적 자금 흐름 변화가 맞물린 '뉴노멀'로 진단한다. 과거 환율 상승이 '신용 위기'의 전조였다면, 지금은 '구조적 변화'의 결과라는 분석이다.

이처럼 과거와 같은 위기 징후가 뚜렷하지 않자, 외환당국의 스탠스에서도 기류 변화가 감지된다. 급격한 쏠림을 경계하면서도 '과거와 같은 위기는 아니다'라고 선을 긋는 모양새다.

외환당국, 과거와 달라진 대응…이창용 "변동성 예의주시하지만 지표 건전"

전날 서울외환시장에서 달러·원 환율은 오후 3시 30분, 전일 종가 대비 2.0원 오른 1467.7원을 기록했다. 지난달 말 종가(1424.4원)와 비교하면 약 열흘 새 43.3원이 오른 셈이다.

달러·원 환율은 지난 4월 미국발 관세 폭풍과 계엄령·탄핵정국 등 국내 정치 불안으로 연고점(1487.6원)을 기록한 후 1350원 선까지 안정되는 흐름을 보였다. 그러나 지난달부터 다시금 1400원을 돌파하며 상승세를 재개하고 있다. 미국 정부 셧다운, 일본의 엔저 흐름, 대미 투자 우려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환율이 1400원대 후반에서 고공행진을 이어가자 외환당국은 경계 태세를 높이고 있다. 다만 기존처럼 경제·금융수장 회의체(F4) 등을 통한 적극적인 구두 개입 방식의 대응은 하고 있지 않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지난 12일 외신 인터뷰에서 개인 의견을 전제로 "시장이 불확실성에 과도하게 민감하게 반응한다고 생각한다"며 "(환율이) 과도하게 움직일 때는 개입할 의향이 있다"고 강조했다.

이 총재는 현재 환율 급등이 과거와 같은 위기 징후는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그는 "최근 환율 움직임은 대부분 국내 거주자의 해외 투자에 좌우됐다"며 "외화 부채 수준은 안정적이고 다른 지표들도 우리 시장의 건전성을 시사한다"고 진단했다.

기재부 관계자는 통화에서 "환율 레벨에 대해서는 말씀드릴 수 있는 부분이 없다"며 "모니터링하고 있다"고 밝혔다.

'환율 1400원=위기' 공식…기초체력 달라지자 변했다

과거 외환당국과 시장이 1400원 선을 강력한 저지선으로 여겼던 이유는 환율 급등이 곧 '디폴트 리스크'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단기 외채 비중이 높았던 탓에 원화 가치가 폭락하면 외화부채 상환 부담이 커지고, 이는 국가 신용도 하락과 외국인 자금의 급격한 유출로 직결됐다. 외환위기나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에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전문가들은 현재의 환율 상승이 국내 신용위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고 입을 모은다. 실제 국가 부도 위험을 나타내는 신용부도스와프(CDS) 프리미엄이나 국내 신용스프레드 등 관련 지표들은 안정적인 흐름을 유지하고 있다. 채권시장은 한은의 금리인하 기대 약화로 약세를 보이고 있지만, 주식시장은 최고점을 경신하며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다.

오히려 한국 경제의 펀더멘탈(기초체력)은 과거 위기 때와 비교할 수 없이 탄탄해졌다는 평가다. 단기외채 상환 부담도 크지 않다. 한은에 따르면 올해 2분기 말 기준 단기외채 비중(단기외채/총외채)은 22.7%로 안정적인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또한 연기금과 개인들의 해외투자 확대로 한국이 보유한 해외순자산 규모가 가파르게 증가하며 외화 건전성이 오히려 강화됐다. 반도체 호황 등에 힘입어 경상수지 흑자 기조도 견고하다.

박상현 IM증권 연구원은 "국내 신용위험이 부각되지 않고 있어 현재 외국인의 자금 이탈을 크게 우려할 필요가 없다"며 "최근 외국인 주식 순매도는 미국 내 단기 자금시장 경색과 차익실현 물량일 뿐, 추세적 이탈로 보기 어렵다"고 분석했다.

서울 중구 하나은행 위변조대응센터에 놓인 달러화. 2025.11.5/뉴스1 ⓒ News1 이호윤 기자
'美 예외주의'·'서학개미'가 만든 새 균형…1400원대가 '뉴노멀'

전문가들은 최근의 고환율을 '뉴노멀'로 규정하며, 1300원대 후반에서 1400원대 초중반 환율이 새로운 균형 수준이 되고 있다고 분석한다.

박 연구원은 "1300원대 후반~1400원대 초중반 달러·원 환율이 새로운 뉴노멀 수준이 되는 상황 속에서 현재 환율 수준은 변동성 구간 내 환율 수준"이라고 평가했다.

이러한 구조적 변화를 이끄는 첫 번째 요인으로는 '미국의 예외주의'가 꼽힌다. 미국이 인공지능(AI)과 디지털 경제를 주도하며 타국 대비 높은 성장률과 금리 수준을 유지하자, 달러화의 추세적 강세가 고착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 트럼프 1기 행정부 집권 이후 달러·원 환율은 추세적 상승 흐름을 보인다.

두 번째 요인은 국내 외환시장의 구조적 수급 변화다. 과거에는 외국인 자금 유출입이 환율을 결정했지만, 지금은 연기금을 비롯한 국내 거주자들의 해외투자가 급격히 확대되면서 구조적인 달러 수요(원화 약세 요인)를 유발하고 있다.

송민기 한국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달러인덱스와 밀접하게 연동돼 움직이던 달러·원 환율은 2024년 이후 달러인덱스와의 괴리가 점진적으로 확대되면서 원화의 상대적 약세 현상이 심화됐다"며 그 배경으로 해외증권투자 증가 등 수급 여건의 구조적 변화를 지목했다.

"高환율, 반도체·유가 '호재' 맞물리면 낫다" 분석도…1480원이 다음 상단

현재의 고환율이 한국 경제와 금융시장에 오히려 '호재'로 작용할 수 있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통상 원화 약세는 수입 물가를 끌어올려 부담으로 작용하지만, 지금은 전제 조건이 다르다는 것이다.

박상현 IM증권 연구원은 "유가는 60달러를 중심으로 한 등락을 거듭 중이고 반도체 가격은 유례없는 급등세를 보인다"며 "여기에 원화 약세가 교역조건 개선 압력, 즉 국내 기업들의 수출 경쟁력 강화로 이어질 수 있다"고 밝혔다.

이는 일본의 '슈퍼 엔저' 효과와 유사하게 국내 수출 기업들의 실적 개선으로 이어져, 환율 상승에도 불구하고 증시가 굳건히 버티는 요인으로 꼽히기도 한다.

다만 환율 상승이 무한정 용인되는 것은 아니다. 환율 상승이 수입물가 상승으로 이어져 인플레이션을 촉발할 가능성이 상존하기 때문이다.

김정식 연세대 경제학부 명예교수는 "환율 급등세가 이어지면 물가가 올라가고, 이로 인해 가계 소비 여력이 줄어 내수가 침체되면서 다시 위기가 오는 악순환이 지속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시장에서는 지난해 계엄령 사태 당시 진입했던 1480원대를 다음 상단 저항선으로 보고 있다. 금융시장에서는 외환당국의 '스무딩 오퍼레이션'(미세조정) 물량이 상단을 방어하고 있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문다운 한국투자증권 연구원은 "1480원대에서는 국민연금의 전략적 환헤지나 당국의 미세조정도 나올 가능성이 있다"며 급격한 추가 상승은 제한될 것으로 예상했다. 권아민 NH투자증권 연구원 역시 "환율 1470원대 후반은 연말 연초 국민연금의 전술적 환헤지가 출회된 수준"이라고 분석했다.

min785@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