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3500억불 선불' 압박에…전문가 "통화스와프 없인 협상 어려워"

한미 관세 후속 협의 교착…美 3500억달러 현금 투자 연일 압박
미 상무장관 '3500억불+α' 요구도…전문가 "전략적 지연도 고려"

이재명 대통령이 23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유엔 본부에서 열린 제80차 유엔 총회에서 기조연설을하고 있다. ⓒ 로이터=뉴스1 ⓒ News1 황기선 기자

(세종=뉴스1) 이정현 나혜윤 임용우 기자 = 미국이 3500억 달러(약 493조 원)에 달하는 대규모 대미 투자를 한국에 선불로 요구하는 가운데, 전문가들은 한국의 외환보유액과 경제 여건을 고려할 때 무제한 통화스와프 없이는 이번 투자 협상이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입을 모은다.

미국이 일본과 맺은 대규모 선불 투자 방식을 한국에도 요구한다면, 전문가들은 일본이 기축통화국이자 상설 통화스와프 체결국이며 외환보유액도 한국의 두 배 이상인 점을 들어, 한국도 이에 상응하는 통화스와프와 외환 안정장치를 확보해야 한다는 논리로 미국을 설득해 통화스와프 확보를 강력히 요구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25일(현지시간) 한미 무역 합의에 따라 한국이 미국에 투자하기로 한 3500억 달러에 대해 "그것은 선불(up front)"이라며 또다시 압박 수위를 높였다.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장관도 3500억 달러보다 투자 규모를 더 늘려야 한다며 압박에 동참했다.

이에 한국 정부는 대규모 투자로 인한 외환시장 충격을 막기 위한 안전장치로 무제한 통화스와프 체결을 적극 요구하며 맞서고 있다.

통화스와프는 자국 통화를 상대국에 맡긴 뒤 정해진 환율로 상대국 통화를 빌려오는 제도로, 외환시장의 급변동성에 대응할 수 있는 국가 간 마이너스 통장 같은 역할을 한다. 과거 한국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와 2020년 코로나 위기 시 미국과 한시적 통화스와프를 체결한 바 있지만, 이번처럼 대규모 투자를 위한 무제한 스와프를 요구하는 것은 이례적이다.

전문가들은 3500억 달러가 한국 외환보유액의 84%에 달하는 규모인 만큼, 이를 현금으로 선불 투자하면 환율 급등과 수입물가 상승 등으로 인해 제2의 외환위기가 현실화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허윤 서강대 국제통상학과 교수는 "미국이 한국에 요구하는 대미 투자 현금 비중 확대는 단순한 금액 문제가 아닌 한국 금융시장의 안정성과 직결된다"면서 "우리 외환시장은 작은 충격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구조로, 수백억 달러 단위 현금 투입만으로도 금융시장 전반의 불안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는 만큼 안전판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송영관 KDI 연구위원도 "미국이 요구하는 대로 직접 투자를 강행하면 과거 IMF 외환위기와 같은 사태가 올 수도 있다"며 "통화스와프가 없으면 3500억 달러 투자는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진단했다.

미국과 5500억 달러 규모의 투자 협정을 이미 체결한 일본은 기축통화국이면서 미국과 상설 통화스와프를 체결하고 있다. 외환보유액도 한국의 두 배 이상에 달한다.

반면 한국은 비기축통화국이며, 통화스와프 체결도 과거 금융위기나 팬데믹과 같은 비상시에 한정돼 있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현실적 차이를 무시한 채 일본과 동일한 대규모 선불 투자 방식을 한국에 강요하는 것은 형평성에 맞지 않다고 지적한다.

유엔총회 참석차 미국 뉴욕을 방문했던 이재명 대통령도 지난 24일 대한민국 유엔대표부에서 스콧 베선트 미국 재무장관을 만나 "한국은 경제 규모나 외환시장 인프라 등에서 일본과 다르다"며 일본과 같은 투자 조건을 요구하려면 이에 상응하는 통화스와프와 외환 안정장치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한 바 있다.

송영관 연구위원은 "무제한 통화스와프 요구를 고수하면서 미국 내 상황 변화를 지켜보며 시간을 버는 것도 좋은 협상 전략이 될 수 있다"며 "한국은 일본과 처한 경제 환경이 확연히 다르며, 형평성 측면에서 일본식 투자 협상을 맺기 위해선 일본에 준하는 조건이 채워져야 함을 미국에 명확히 강조해야 한다"고 밝혔다.

euni1219@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