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지수표' 내줄 수 없다는 李…한미 관세 후속 협의 '고차방정식'

산업장관 방미, 美 러트닉 만나 대미 투자펀드 방식 등 논의
李 '국익 중심' 원칙 강조…"이익 없이 무역 합의 사인 왜 하나"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10일 서울 마포구 프론트원에서 열린 국민성장펀드 보고대회에서 참석자들의 발언을 듣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 SNS. 재판매 및 DB 금지) 2025.9.11/뉴스1 ⓒ News1 허경 기자

(세종=뉴스1) 이정현 기자 = 이재명 대통령이 '국익 중심'의 협상 원칙을 분명히 밝힌 가운데, 한미 관세 협상의 후속 조치 이행을 둘러싼 실무 협의가 순탄치 않을 전망이다.

미국 측이 대미 투자협력 펀드의 조성 규모와 운용 방식에 있어 '3500억달러(약 485조 원) 규모의 투자 백지수표'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현실적이 재정 여건을 고려한 한국 정부는 직접투자 5%, 나머지는 보증 중심의 투자 지원 방식을 고수하고 있어, 미국과의 입장 차는 쉽게 좁혀지지 않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여기에 최근 조지아주에서 발생한 불법체류 단속 과정에서 300여 명의 한국인 노동자가 구금된 사태와 관련해, 대미 투자기업에 대한 비자 제도 개선 문제까지 맞물리면서 후속 협의의 변수는 더욱 복잡해지고 있다.

산업장관은 후속 협상차 급거 방미…대미 투자협력·농축산물 이견 조율할 듯

12일 통상당국에 따르면 전날 오전 김정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인천공항을 통해 미국 뉴욕으로 출국했다. 이번 방미는 한미 관세 협상에서 합의된 내용들이 후속 세부 조율 과정에서 난항을 겪으며 이행이 지연되는 상황에서 전격적으로 이뤄졌다.

김 장관은 이번 방미 중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장관을 만나 양국이 이견을 보이는 대미 투자협력 펀드나 자동차 관세 조정 등 핵심 이슈에 대한 입장 조율에 나설 것으로 전해졌다.

앞서 지난 4일 일본이 미국과의 무역 합의에 먼저 성공하면서, 한국 통상당국의 부담은 더욱 커진 상황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일본산 자동차에 대한 품목 관세를 15%로 낮추는 내용의 행정명령에 서명했고, 해당 조치는 오는 16일부터 발효된다. 미국 시장을 두고 한국과 경쟁 중인 일본이 15%의 낮은 관세 혜택을 선점하면서, 국산 자동차 업계의 수출 타격은 더 커질 것이란 우려도 커지고 있다.

실제 유엔 무역통계에 따르면, 올 2분기 미국이 한국에서 수입한 자동차는 75억7564만 달러(약 10조5000억 원)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9억7621만 달러(28.2%) 줄었다. 독일(21억2472만 달러), 캐나다(13억7058만 달러), 일본(1억7430만 달러) 등 다른 경쟁국보다 감소 폭이 컸다.

한국 자동차의 대미 수출 급감은 현대차가 관세를 피하기 위해 현지 재고를 최대한 활용한 결과로 풀이된다. 하지만 재고가 다 소진되는 하반기에는 관세 영향이 본격화하면서 수출 타격은 더욱 심화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여기에 최근 조지아주에서 발생한 한국인 노동자 300여명 구금 사태와 관련한 미국의 비자 제도 문제도 변수로 떠오르면서 협상은 더 복잡해졌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우리 정부는 대미 투자기업에 대한 '취업비자 쿼터'를 강하게 요구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현재 싱가포르와 칠레는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FTA)에 따라 H-1B1 비자라는 별도 국가별 쿼터를 보유하고 있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별도의 국가별 쿼터가 없어 H-1B 비자 추첨에 의존하고 있다.

기업 입장에서는 지방 공장 위주로 현지 채용이 어려운 상황에서 숙련된 한국인 전문 인력을 파견하는 데 큰 제약이 되는 셈이다.

김 장관은 이번 러트닉 상무장관과의 면담에서 이 같은 비자 제도 개선 문제도 테이블에 올릴 것으로 전해졌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5일(현지시간) 한미 정상회담에서 한국 측이 무역 협상에 일부 문제를 제기했지만 원래 합의한 대로 계약을 체결할 것이라고 밝혔다. 한미 양국은 지난달 미국의 상호관세를 15%로 낮추고 한국이 미국에 3500억 달러(약 487조 원)를 투자한다는 내용의 무역 합의를 맺었다. 사진은 26일 경기 평택시 포승읍 평택항에 수출용 컨테이너들이 쌓여있는 모습. 2025.8.26/뉴스1 ⓒ News1 김영운 기자
세부 협의는 '고차방정식'…李 "이익되지 않은 상황에 사인을 왜 하나"

지난 7월 말 타결된 한미 관세 협상에서 우리나라는 미국으로부터 현행 25%인 자동차 관세를 15%로 인하하는 데 합의했다. 하지만 3500억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협력 펀드 운용 방식 등을 둘러싼 양국 간 이견으로, 후속 조치 이행을 위한 '합의 명문화'가 지연되면서 실제 관세요율 조정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미국 측은 실무협의에서 한국이 제시한 대미 투자협력 펀드와 관련해 운용 방식, 결정 구조, 이익 배분 방안 등의 구체적인 계획을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이 제안한 투자 패키지는 조선 분야에 1500억 달러, 반도체 등 전략 산업에 2000억 달러를 각각 투자하는 방식이다. 투자는 직접 투자(equity)와 대출(loans), 보증(credit guarantees) 등으로 구성된다.

이와 관련해 미국은 한국이 자국이 지정한 분야에 더 높은 비율로 직접 지분 투자에 나설 것을 강하게 요구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우리 정부는 5% 수준의 직접 투자를 염두에 두고 있으며, 나머지는 보증 방식으로 재정 부담을 줄이겠다는 구상이다.

또한 미국은 투자 대상 선정 시에도 주도권을 행사하겠다는 입장이다. 투자 이익 귀속 문제에서도 투자 이익의 90%를 자국이 보유하겠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아울러 지난 관세 협상 과정에서는 언급되지 않았던 대표적 비관세장벽인 농축산물 시장 개방에 대해서도 한국의 실질적인 행동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동안 우리 통상당국은 이 같은 민감한 사안에 대해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해 왔다. 지난 관세 협상에서도 대미 투자협력 펀드 관련 구체적인 투자계획을 공개하지 않은 것은 큰 틀에서 미국의 요구를 수용하는 모습을 취하되 세부 계획 수립 과정에서 우리의 국익을 최대한 지키겠다는 전략이었다.

이재명 대통령은 전날 가진 취임 100일 기념 기자회견에서 일본의 상황과 빗대 '한미 정상회담 이후 관세 협상 최종 서명을 하지 않았다'는 일각의 지적에 대해 "미국의 일방적인 관세 증액에 방어하러 간 것"이라며 "이익이 되지 않은 상황에서 사인을 왜 하는 것이냐"고 했다. 이어 "최대한 합리적인 사인을 하도록 해야 한다"며 "사인 못 했다고 비난하지 말라"고 강조했다.

남은 관세 협상 후속 협의와 관련해서도 "분명한 건 어떤 이면 합의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대한민국 국익에 반하는 결정을 절대 하지 않을 것"이라며 "합리성과 공정성을 벗어난 협상도 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허윤 서강대 국제통상학과 교수는 "국내 자동차 업계가 처한 현실적인 어려움을 충분히 이해한다"며 "하지만 (후속 협상에)방위비 분담 문제나 디지털 규제 문제 등 직접 공개는 되고 있지 않지만 다른 문제들도 많이 걸려있는 사안인 만큼 서두르기보다는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그러면서 "대통령도 국익 차원에서 그렇게 판단한 거 같고, 충분히 수긍되는 얘기"라고 덧붙였다.

euni1219@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