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련공 노하우 AI에 넘겨라?…"기술 보존" vs "일자리 대체" 충돌

산업부, 제조 '암묵지' AI화 추진…고령화 따른 기술 단절 막고 생산성 제고
"수익 배분 기준 없고 고용 위축" 노동계 반발…데이터 소유권 논란 새 전선

보스턴다이나믹스가 제작한 이족보행 로봇 아틀라스. (현대자동차 제공. 재판매 및 DB금지) /뉴스1

(세종=뉴스1) 김승준 기자 = 정부가 제조업 숙련 노동자의 '암묵지'(暗默知, 노동자가 수십년 넘게 쌓은 노하우)를 인공지능(AI) 학습 데이터로 전환하는 사업을 추진하면서, 일자리 축소 우려를 둘러싼 노동계 반발이 확산되고 있다. 생산성 제고와 기술 보존이라는 정책 취지에도 불구하고, 기술 대체에 따른 고용 감소 가능성과 함께 숙련 데이터의 소유권·이익 배분 기준이 불명확하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특히 수십 년간 축적된 경험과 직관이 AI 모델로 전환돼 생산성 향상으로 이어질 경우, 그 성과를 누구에게, 어떤 방식으로 나눌 것인지에 대한 사회적 기준이 없다는 점이 핵심 쟁점으로 부상하고 있다. '노하우의 데이터화'가 일자리 구조 재편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까지 맞물리며 AI 시대 노동 갈등의 새로운 전선이 형성되는 양상이다.

"기술 단절 막아야"…숙련공의 '미세 감각'까지 AI가 학습

29일 산업통상부에 따르면 정부는 6월 시행을 목표로 '제조 암묵지 기반 AI 모델 개발' 사업을 추진 중이며, 이를 위한 권역별 순회 사업설명회를 진행하고 있다.

이 사업의 핵심은 숙련 노동자의 경험과 감각에 기반한 비정형 지식을 데이터로 전환해 AI에 학습시키는 것이다. 노동자의 협조를 바탕으로 인터뷰, 작업 영상, 센서 데이터 등을 수집·분석해 생산 공정과 설비 운영, 품질 관리 등에 활용하겠다는 구상이다.

'암묵지'는 개인의 경험과 직관, 노하우가 결합된 지식으로 말이나 문서로 체계화하기 어려운 특성을 갖는다. 예컨대 숙련공이 평소와 다른 기계 소리나 미세한 진동만으로 설비 이상을 사전에 감지하거나, 작업 효율을 높이는 요령을 터득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이 같은 지식은 제조업 전반에 걸쳐 축적되지만, 온도·습도 변화나 제품별 편차 등 현장의 미세한 변수까지 반영하기 어려워 표준화되지 못한 채 도제식 교육이나 비공식적 전수에 의존해왔다.

정부는 이러한 암묵지를 AI로 전환해 고령화로 인한 기술 단절을 막고 생산성을 높이겠다는 입장이다. 실제로 한국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제조업에서 50대 이상 근로자 비중은 2010년 15.7%에서 2020년 30.1%로 크게 늘었다. 숙련 인력 은퇴가 본격화될 경우 기술 축적 자체가 끊길 수 있다는 우려가 반영된 것이다.

김정관 산업부 장관은 "암묵지 AI 사업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산업 경쟁력 유지를 위한 필수 과제"라며 "고령화와 인력 기피가 지속될 경우 산업 기반 자체가 약화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업계에서도 필요성은 인정한다. 현재 AI는 주로 문서화된 데이터에 기반해 학습돼, 소리·진동·온도·외형 변화 등 물리 세계의 미세한 신호를 해석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많다. 세계적 AI 석학 얀 르쿤 뉴욕대 교수도 "AI는 물리 세계 이해 측면에서 아직 제한적이며, 텍스트 중심 학습만으로는 인간 수준에 도달하기 어렵다"고 언급한 바 있다.

"내 노하우로 만든 AI 수익은 누구에게?"…'이익 배분·고용 갈등' 불씨

다만 노동계는 숙련의 데이터화가 가져올 구조적 변화에 대한 대비가 부족하다고 반발하고 있다. 특히 노동자의 경험과 기술이 AI로 전환될 경우, 그 결과물의 권리와 수익 배분을 둘러싼 기준이 없다는 것과 일자리 축소 가능성 등을 문제로 지적한다.

한국노총은 "수십 년간 축적된 숙련이 AI 모델로 전환돼 기업의 생산성 향상으로 이어질 경우, 그 이익을 어떻게 나눌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없다"며 "데이터를 제공한 노동자에 대한 권리 보장과 보상 체계가 선행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AI 도입은 일자리 축소와 직무 재편, 숙련 가치 하락 등 구조적 변화를 수반할 수밖에 없다"며 "고용 영향에 대한 실질적 대책과 이익 공유 구조 없이 사업을 추진하는 것은 정당성을 확보하기 어렵다"고 강조했다.

해외에서는 유사한 시도가 이미 진행되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일본 건설업에서는 베테랑 노동자의 위험 판단 노하우를 데이터화해 산업재해를 예측하는 AI 시스템이 도입됐으며, 제조·물류 분야에서도 작업 영상과 센서 데이터를 활용한 생산성 개선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AI 학습 데이터 제공에 대한 대가 산정이나 지식 소유권을 둘러싼 기준은 국내외 모두 명확히 정립되지 않은 상태다. 저작권과 데이터 활용을 둘러싼 분쟁도 이어지고 있어, 관련 논의는 장기화될 가능성이 크다.

김 장관은 "노동계의 우려를 이해한다"며 "충분한 협의를 통해 제도적 보완 방안을 마련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전문가들도 암묵지의 데이터화가 산업 경쟁력 유지에 필수적인 흐름이라는 점에는 공감하면서도, 제도적 장치 없이 추진될 경우 갈등이 불가피하다고 지적한다. '숙련의 데이터화'라는 새로운 자산을 둘러싸고 권리와 보상의 기준을 어떻게 설정하느냐가 향후 핵심 쟁점이 될 것이란 전망이다.

seungjun241@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