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먹거리 비관세장벽' 압박에…정부, 협상 카드 조율 '진땀'
소고기·쌀·사과 등 통상협상에 민감 품목 줄줄이 도마 위
농업계 반발에 與 농해수위, 통상본부장 불러 비공개 당정
- 나혜윤 기자
(세종=뉴스1) 나혜윤 기자 = 한미 간 상호관세 유예 시한(8월 1일)이 열흘 앞으로 다가온 가운데, 미국이 쌀·소고기·사과 등 농축산물 분야의 비관세장벽 해소를 강하게 압박하면서 정부의 고민도 깊어지고 있다.
정부는 일부 농축산물의 추가 시장 개방 가능성을 시사하며 협상 카드 조율에 나섰으나, 국내 여론과 농업계의 반발이 동시에 확산되면서, 협상 국면에 난항이 예상된다.
22일 정부 당국에 따르면 한미 관세 협상의 핵심 쟁점 중 하나는 농식품 검역 등 비관세장벽 문제다. 미국은 해마다 발간하는 국별 무역장벽보고서(NTE)를 통해 △30개월 이상 미국산 소고기 수입 제한 △쌀 수입 물량 제한 △사과 등 과일 검역 절차 지연 △GMO 승인 지연 △PLS(농약허용물질목록관리제도) 등을 대표적인 시장 접근 저해 요인으로 지목해왔다.
이 중 소고기 문제는 여론 리스크가 가장 큰 쟁점으로 꼽힌다. 한국은 2008년 광우병 사태 이후 30개월 미만 미국산 소고기만 수입하고 있다. 미국은 이같은 월령 제한은 자의적이며, 대부분의 국가가 해제한 만큼 한국도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미국에서도 30개월이 넘은 소고기의 경우 구이용보다 햄버거 패티 등 가공육으로 주로 유통된다.
이 때문에 국내에서는 30개월 이상 소고기 수입이 허용될 경우, 가공육까지 포함한 수입 개방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월령 구분이 어려운 가공육에 대한 수입은 현재 금지돼 있지만, 규제 완화 시 연쇄적인 시장 개방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
이와 관련해 정부는 "한국은 미국산 쇠고기의 최대 수입국으로, 소비자 신뢰가 흔들릴 경우 미국산 수입 전체에 타격이 불가피하다"는 논리로 방어에 나서고 있다. 농림축산식품부 역시 소비자 안전과 여론 악화를 이유로 완화 요구에 신중한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쌀도 대표적인 민감 품목 중 하나다. 현재 한국은 연간 40만 8700톤의 저율관세할당물량(TRQ)을 설정해 5% 세율로 수입하고 있으며, 이를 초과하는 물량에는 513%의 고율 관세를 부과하고 있다. 미국은 이같은 높은 관세율과 TRQ 방식 자체를 '과도한 시장 장벽'으로 보고 자국에 유리한 방향의 조정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TRQ 물량은 미국, 중국, 호주, 태국, 베트남 등 5개국에 이미 배분돼 있어 미국 몫을 일방적으로 늘리기는 사실상 어렵다. 다른 국가의 물량을 줄이기 위해선 세계무역기구(WTO)의 재동의가 필요하고, 미국만 늘려줄 경우 국내 통상절차법상 국회 비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정부 내에서도 "쌀 증량 조정은 기술적·정치적으로 모두 부담이 크다"는 인식이 강한 것으로 전해진다.
사과 등 과일류는 병해충 유입 및 생태계 영향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병해충 유입 위험성 평가 때문에 검역 협상도 복잡하다. 미국산 사과는 수입 검역 협상이 30년 넘게 진행되고 있지만, 아직 8단계 중 2단계에 머물러 있다. 정부는 "검역 협정은 과학적 평가에 기반하므로 몇 년 이상이 걸릴 수 있다"고 설명한다.
현재까지 정부는 미국산 사과 수입에 대해 공식적인 결정이나 입장을 내놓지 않았지만, 최근 산업부가 농림축산식품부에 '전향적 검토'를 요청한 사실이 알려지며 논란이 확산되고 있다. 농업계는 "정부가 국민 건강과 농업 생태계를 위협하는 품목을 무리하게 협상 카드로 꺼내는 것 아니냐"며 반발하고 있다.
한미 통상 협상을 담당하는 여한구 통상교섭본부장은 지난 14일 기자 간담회에서 "어느 나라와 통상 협상하든 농산물이 고통스럽지 않은 협상이 없었고, 우리 산업 경쟁력은 강화됐다"며 "농산물도 전략적 판단을 해야 하는 부분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여 본부장의 이같은 발언은 농축산물 추가 개방을 시사하는 발언으로 해석되며 농업계의 거센 반발과 우려를 불러일으켰다.
한국농축산연합회와 한국종합농업단체협의회·축산관련단체협의회·농민의길 등 농·축산업 단체들은 지난 18일 용산 대통령실 앞에서 공동 기자회견을 열고 "농업인의 양해와 동의 없이 농축산물 관세, 비관세장벽을 허문다면 절대 간과하지 않을 것"이라며 "대한민국 농업의 지속성 확보와 5000만 국민의 건강권 보장을 위해 투쟁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같은 날 국회 농림수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 의원들도 여한구 본부장과 당정 간담회를 비공개로 열고 "미국에 과도한 양보로 우리 쌀·한우 농가가 피해를 입어선 안 된다"는 취지의 당부를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간담회에서 여 본부장은 한미 관세 협상 진행 상황을 설명하고 의원들은 농가의 우려를 전달한 것으로 전해졌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미국산 농축산물 수입 규제 완화가 이재명 정부 출범 초기의 핵심 시험대가 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정부로서는 미국과의 통상 실익을 확보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는 반면 여당과 지지층, 농촌 기반과의 조율도 동시에 요구받고 있어서다.
특히 한미 통상에서 일정 수준의 양보가 불가피하다는 현실 속에서도, 농업계와의 사전 협의 부족은 향후 여론의 역풍을 불러올 수 있다는 점에서 정부의 전략적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시험대에 올랐다는 평가다.
여권 관계자는 "농업은 정치적으로 단순한 산업을 넘어서는 민감 사안 중 하나"라며 "미국과의 통상 협상에서 일정 부분 조정이 불가피하더라도, 농민과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사전 소통과 방어 논리가 없다면 협상 자체가 정치적 부담으로 되돌아올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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