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관계 교착의 구조적 요인과 실용주의적 평화공존[특별기고]
임을출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
2025년 6월 출범한 이재명 정부의 대북 정책 방향은 분명했다. 취임 후 첫 번째 조치로 확성기, 전단, 단파방송과 같은 접경지역 심리전 수단들이 차례차례 거두어졌다. 북한 체제를 존중하고 어떠한 형태의 흡수통일도 추구하지 않으며 일체의 적대행위를 하지 않겠다는 '대북 정책 3원칙' 등, 반목과 적대의 관성을 끊어 내겠다는 의지도 반복해서 발신되었다. 남북 대화와 각종 교류·협력 재개의 문을 항상 열어놓고 있다는 메시지 역시 북한과 국제사회를 향해 끊임없이 내놓고 있다.
그러나 평양의 반응은 요지부동이다. 서울이 내민 화해와 평화공존의 손길에 대부분 묵묵부답으로 일관하고 있다. 때로는 최고지도자의 복심인 김여정 당 총무부장을 내세워 '두 국가' 노선이 일시적 조치가 아닌 불변의 국가 노선이라는 점을 거듭 확인하고 있다. 사실 지금의 교착 상태는 우리 평화공존 정책의 방향성이나 진정성 여부 때문이 아니다. 서울의 유화 조치에 평양이 호응하지 않는 것은 단순한 심술이나 협상 전술이 아니라, 남북관계 단절이라는 '현상 유지(status-quo)'가 훨씬 더 유리하다는 냉철한 셈법에 따른 것이다. 평양이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 이유를 정확히 진단하려면, 현재 김정은 노동당 총비서의 정세 인식과 함께 서로 맞물려 돌아가는 구조적 요인들을 살펴보아야 한다.
2023년 말 노동당 전원회의에서 김 총비서는 남북관계를 "더 이상 동족·동질 관계가 아닌, 적대적인 두 교전국 관계"로 새롭게 규정했다. 이어 이듬해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서는 헌법 개정을 통해 '통일·민족' 개념 자체를 삭제하고 한국을 "제1의 적대국, 불변의 주적"으로 못 박겠다는 방침을 천명했다. 조국평화통일위원회와 민족경제협력국 등 대남 기구가 정리되었고, 남북 소통의 상징인 경의선·동해선 철도와 도로도 폭파되었다. 2025년 3월에는 헌법에 남북이 '별개의 두 국가'임을 명시하는 영토 조항까지 신설되었다.
주목할 점은 이 일련의 조치들이 대남 메시지이기에 앞서 '대내 메시지'라는 사실이다. USB와 SD카드를 타고 스며든 K-콘텐츠는 북한 젊은 세대의 언어와 취향을 급속도로 잠식했다. 북한 당국이 2020년부터 반동사상문화배격법, 청년교양보장법, 평양문화어보호법을 연이어 제정하고 한국 영상물 시청은 물론 '남한식 말투' 사용까지 형사처벌 대상으로 삼은 것은 이러한 위기의식의 방증이다. '두 국가'론의 본질은 단순히 민족이나 통일 담론의 폐기가 아니라, 흡수통일의 공포로부터 체제와 정권을 방어하기 위해 김 총비서가 선택한 '이념적 방화벽'이다. 바로 여기에서 해소하기 어려운 충돌이 발생한다. 우리 정부의 남북관계 개선 시도는 북한 입장에서 이 방화벽을 허물려는 시도로 받아들여진다. 남북 간 접촉면 자체가 바이러스의 유입 통로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요인은 앞으로도 남북관계의 근본적 현상 변경을 가로막는 핵심 장애물로 작용할 것이다. 외부적 변수가 아닌 북한 정권의 내적 생존 본능에서 파생된 장애물인 만큼, 남북관계 개선이 가져다줄 웬만한 기대이익보다 당연히 우선순위가 높을 수밖에 없다.
'두 국가론'이 남북관계를 바라보는 '관점의 변화'라면, 중국·러시아와의 밀착은 남북관계 개선의 '수요와 동인'을 약화시켰다. 과거 북한은 대북 제재에 따른 체제 관리 압력을 남북 간 경제협력과 인도적 지원을 통해 일정 수준 낮출 수 있다는 셈법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대중·대러 관계 개선의 결과로 제재 레짐이 약해지면서 남북관계 호응 필요성을 다시 계산하기에 이른 것이다.
특히 2024년 6월 북·러 간 체결한 '포괄적 전략적 동반자 관계 조약'은 김 총비서에게 새로운 기회의 창을 열어주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대규모 병력과 함께 포탄, 미사일 같은 군수물자를 지원한 대가로 평양이 얻은 실익은 실로 막대하다. 국가안보전략연구원은 2025년 12월까지 대러 파병과 무기 수출로 인한 수익을 약 110억 달러로 추산하고 있다. 식량, 에너지, 외화 같은 즉각적인 보상뿐만 아니라 정찰위성, 잠수함, 방공체계 등 자력으로 확보하기 어려웠던 첨단 기술의 이전 가능성도 꾸준히 거론된다.
무엇보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등 외교 무대에서 러시아가 제공하는 '거부권 우산'은 매우 값진 전리품이다. 실제로 그간 대북 제재 이행을 감시하던 '유엔 안보리 대북제재위원회 전문가패널'이 2024년 3월 러시아의 거부권 행사로 활동을 종료했다. 이후 한국, 미국, 일본 등 11개국이 참여하는 '다국적제재모니터링팀(MSMT)'이 출범했으나, 기존 안보리 차원의 제재 레짐 감시 역할을 완전히 대체하지는 못하고 있다.
북한은 러시아와 중국의 묵인·비호 아래 노동자 해외 파견, 유류 환적, 금융망 우회 등의 방식으로 경제적 활로를 회복했다. 과거에는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을 통한 외화가 고립된 경제의 숨통이었다면, 지금은 그 수요의 상당 부분이 모스크바를 통해 충당되고 있다. 2025년 9월 김 총비서는 중국 전승절 80주년 열병식에 참석해 시진핑 주석, 푸틴 대통령과 나란히 섰다. 이는 현재 북한의 국제적 위상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었다. 더 이상 고립되고 가난한 약소국이 아니라, 첨예해지는 진영 대결 구도 속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견제하며 힘의 균형을 잡아주는 '전략 국가'로 변모했음을 국제사회에 시위한 것이다.
북한은 이제 한국을 거치지 않고도 미국과 직접 상대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그 자신감의 토대는 두말할 필요 없이 지난 몇 년간 비약적으로 키운 '핵무기고'이다. 북한의 핵·미사일 능력은 2019년 '하노이 노딜' 이후 협상 공백기 동안 질적·양적으로 도약했다. 2025년 6월 김 총비서는 새로 지은 우라늄 농축시설 방문 사실을 공개하며 "핵물질과 핵무기 생산을 가속화할 것"을 지시했다.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SIPRI)는 북한이 전년 대비 10개 증가한 60개의 핵탄두를 보유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또한 액체·고체 추진을 넘나드는 다종의 ICBM은 물론 대형 방사포, 극초음속 활공체,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등 투발 수단의 다변화도 상당 부분 진전되었다. 2022년에는 '핵무력정책법'을 제정하여 선제 핵사용 조건과 방식을 구체화했고, 2023년 9월에는 헌법에까지 '핵보유' 원칙을 명문화했다. 이 모든 흐름을 관통하는 메시지는 하나이다. 과거 방식의 비핵화 협상은 완전히 끝났으며, 앞으로는 북한의 핵보유라는 달라진 현실을 인정하는 조건 아래 핵보유국인 미국과 직접 담판을 짓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프레임 안에서 서울의 위상과 입지는 급격히 줄어든다. 이미 북한은 우리를 '핵이 없는 미국의 종속변수'라고 규정하며 협상 상대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여기에 '두 국가론'까지 맞물려 과거 북·미 협상 국면에서 우리가 수행했던 중재자·촉진자의 공간은 더욱 축소되었다. 최근 미국 트럼프 대통령의 연이은 대북 우호 발언 역시 '결국 시간은 우리 편'이라는 김 총비서의 인식을 더욱 확고하게 만들고 있다. 핵능력이 증대될수록 기대 보상이 커지는 만큼, 서둘러 대화에 호응할 동인이 부족한 것이다. 이렇듯 핵능력 고도화는 더 이상 북한에 협상 카드가 아니라, 굳이 서둘러 협상에 나오지 않아도 되는 이유가 되고 있다. 북·미 대화 공전 국면이 장기화되면서 남북 대화의 문을 여는 것은 더더욱 어려워지고 있다.
이렇듯 현재 남북관계 교착은 세 가지 구조적 요인에서 비롯된 측면이 강하며, 이 요인들은 서로 견고하게 연결되어 있다. 북한은 체제 유지·관리에 최우선 순위를 두고 '두 국가' 기조를 견고하게 유지하고 있다. 또한 북한을 둘러싼 국제 환경은 남북관계 없이도 버틸 수 있는 우회로를 열어주었다. 마지막으로 나날이 고도화되는 핵미사일능력은 서울을 건너뛰고도 워싱턴에 다다를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이 요인 중 어느 것도 한국 정부의 일방적인 선의와 노력만으로 단기간에 해소하거나 극복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우리 대북 접근법의 문제가 아니라, 대내외 환경 변화에 따라 북한의 셈법 자체가 완전히 변했기 때문이다. 이에 정부도 단시일 내 남북관계 재개가 녹록지 않은 현실을 감안하여, 평화공존 기조를 유지하면서 우선 북·미 관계 진전을 측면 지원하는 페이스메이커 역할에 역량을 집중하고 있는 듯하다. 북·미 대화 성사 및 진전을 위해 노력하고, 그 공간을 활용하여 남북관계 재개를 도모하려는 전략적 접근으로 읽힌다.
지금 필요한 것은 이러한 구조의 의미를 정확히 읽어내고 인내심을 갖고 대비하는 일이다. 세 가지 구조적 요인은 결코 영원할 수 없으며, 하나의 요인이 흔들리면 다른 쪽에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문이 견고하게 닫혀 있을 때 그 문을 무리하게 열려고 하거나 부수어서는 안 된다. 반대로 그 앞에 무기력하게 서 있기만 해서도 얻을 것이 없다. 문이 조금이라도 열리는 순간 바로 들어갈 수 있도록 인내심을 갖고 치밀하게 준비해 두어야 한다. 이것이 진정한 실용주의이다.
서부전선 비무장지대(DMZ)에서 폭발한 지뢰가 이재명 정부의 평화공존 정책을 시험대에 올려놓고 있다. 평화로 가는 길은 직진 코스가 아니라 울퉁불퉁하고 구불구불한 험악한 산길과 같다. 평화공존 정책의 성공 여부는 "국방 안보를 얼마나 촘촘히 챙기면서 우발적 충돌을 얼마나 정교하게 관리해 내는가"라는 현실적인 위기관리 역량에 달려 있다. 위기나 악재가 발생했을 때 정책을 성급히 중단하거나 후퇴시키면, 오히려 상대방에게 '돌발 행동이나 도발을 통해 한국의 정책을 흔들 수 있다'는 잘못된 신호를 줄 수 있다. 조건에 따라 흔들리지 않는 명확한 원칙을 보여주어야 북한도 한국 정부의 평화공존 의지를 계산 가능한 변수로 인식하게 된다. 평화공존 프로세스는 평화로울 때만 가동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긴장이 고조되고 위기가 찾아왔을 때 안전판으로서 그 진가를 발휘해야 한다.
단, 일관성을 유지한다는 것이 사태의 엄중함을 무시하고 무조건적인 진전만 도모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평화공존'이라는 큰 방향(전략)은 흔들림 없이 가되, 북한측의 국경선 요새화의 실태와 의도 재점검과 함께 상응한 군사적 대비태세 강화 등 세부 과제(전술)는 상황에 맞게 촘촘히 보완하며 나아가는 지혜가 필요하다. 안보라는 튼튼한 방어막 위에서만 평화공존이라는 전략도 성립할 수 있다. 실용주의적 평화공존은 "무엇이 대한민국 국민의 안전과 경제에 가장 이득인가"를 최우선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실현 불가능한 주장과 명분보다 실현 가능한 국익을 추구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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