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곤 독립기념관장 "독립운동사 잘 알리는 게 곧 기념관의 정상화"
[뉴스1 초대석] 취임 100일 인터뷰…"손주와 손잡고 다시 찾는 기념관 될 것"
"2027년 개관 40주년…기념관과 함께해 온 국민의 모습 전하고파"
- 대담=서재준 외교안보부장, 김기성 기자
(천안=뉴스1) 대담=서재준 외교안보부장 김기성 기자 = 3·1운동을 계기로 탄생한 대한민국임시정부(임정)의 26년에 걸친 항일 투쟁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쓰레기통에서 버려진 배춧잎을 모아 찬거리로 삼아야 했던 만성적 곤궁, 끊임없는 감시와 암살 위협, 이승만 대통령 탄핵 이후 불거진 내부의 노선 갈등, 상하이부터 충칭까지 이동하는 8년의 대장정까지, 임정의 역사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그럼에도 임정은 독립운동단체를 끊임없이 규합하고, 항일 무장 투쟁을 위해 군대를 창설하는 등 독립을 향한 열망을 끝까지 놓지 않았다. 이 여정에서 백범 김구는 역경 속 임정을 떠받치고 있던 여러 기둥 중 하나였다.
"더부살이하며 공부와 아르바이트를 병행해야 할 정도로 어려운 도시 빈민이었던 나를 붙들어 준 기둥이 '백범일지'였다."
50여 년 전 헌책방에서 김구의 자서전 '백범일지'를 만난 중학생 김희곤은 마음속에 큰 울림을 느꼈다고 한다. 그는 경북대학교 사학과에서 석, 박사까지 졸업하며 임정을 연구하는 학자가 됐고,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의 초대 관장을 거쳐 지난 4월 13일 독립운동사 전반을 전시·연구하는 독립기념관장에 올랐다.
김희곤 독립기념관장은 취임 100일을 앞둔 지난달 15일 충남 천안 독립기념관에서 진행한 '뉴스1 초대석' 인터뷰에서 독립기념관의 역할을 "'일제' 침략에 저항한 우리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역사를 정립하고 국민께 교훈을 주고 일깨우는 것"이라고 소개했다.
김 관장은 지금의 일본과 '일제'(일본 제국주의)는 엄연히 다르지만, 독도 영유권 주장과 일본군 '위안부' 역사 부정은 제국주의 부활의 한 단면이라며, 이러한 "역사 침략"에 대응하기 위해 독립기념관이 국민의 성금으로 탄생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전임 김형석 관장의 언행이 사회적으로 논란이 되면서 독립기념관은 긴 시간 비난의 화살을 맞아 왔다. 김 전 관장은 대한민국의 광복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하며 나타난 산물이라고 발언해 공분을 샀고, 자신의 주변 지인들이 기념관 내에서 개신교 예배를 할 수 있도록 공간을 내어줘 '기관 사유화'라는 거센 비판을 받았다.
그 때문에 학술적으로 김 전 관장의 역사인식을 논하는 것과는 별개로, 그와 같은 생각을 가진 인사가 독립운동사를 알리는 기관장을 맡는 것 자체가 부적절했다는 지적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 대체적인 평가다.
이러한 상황에서 취임한 김 관장은 취임 일성으로 '기관 정상화'를 내세웠다. 그는 '정상화'의 방안에 대해 "기념관이 건설됐을 때의 초심과 목적대로 이곳을 운영하는 것이 곧 정상화"라고 강조했다. 그는 최근 국민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일하는 기념관의 해설사들이 관람객들로부터 받는 항의와 민원이 줄어든 것이 정상화의 한 단면이 아니겠냐며 웃음을 지어 보이기도 했다.
김 관장은 최근 국가보훈부에서 준비하는 독립유공자 서훈 재평가(상향) 문제에 대해서는 신중한 접근법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그는 "서훈 등급 체계가 바뀌면서 1963년 첫 포상을 비롯한 초기 서훈 인사들의 훈격이 너무 낮다는 인식이 확산해 온 것이 사실이지만 독립운동가 서훈은 한 번 결정하면 바꾼 일이 없고, 재심사를 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다"라며 "재심사는 기회균등 문제와 직결된다. 일부 독립운동가만 우선 심사한다면 '댐이 터지듯' 다른 후손들의 반발이 이어질 것이다.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김 관장은 오는 2027년 독립기념관 개관 40주년을 맞아 독립기념관과 국민이 함께 해 온 사진과 기록을 모아 '손주와 손잡고 다시 찾는 독립기념관'이란 메시지를 담은 특별전시를 구상하고 있다.
김 관장은 "독립기념관을 세우기 위해 이곳에 일군 삶의 터전을 떠난 이주민들이 있다. 또 기념관 건립을 위해 성금을 낸 국민들도 있다"면서 "독립기념관과 함께한 국민들의 옛 사진, 성금 증서와 같은 자료를 모아 전시하며 '이제는 손주들, 자녀들 손잡고 다시 방문해 주십시오'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라고 말했다.
다음은 김 관장과의 일문일답
-독립기념관의 기능과 역할을 국민들이 알기 쉽게 설명한다면.
▶식민지를 경험한 나라가 전 세계 170여 개인데, 정작 식민지를 거느렸던 제국주의 국가는 10여 개에 불과하다. 제국주의 국가는 그들의 관점에서 '확장, 팽창, 세계를 향해'라는 개념을 내포한 박물관을 둔다. 반면 침략을 이겨낸 독립운동의 역사를 지닌 나라는 반드시 독립운동과 관련된 기념관을 가지고 있다. 독립기념관은 우리가 일제의 침탈을 되받아치고 독립을 일군 역사를 정립하고, 이를 국민께 알리는 중추적인 기관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에서 국민의 성금으로 탄생한 곳이다.
'일본 제국주의'(일제)는 '역사 침략'을 자행했다. 한 가지 말해둬야 하는 것은 일본과 일제는 엄연히 다르다는 것이다. 일본은 함께 나아가야 할 상대이지만, 일제는 우리를 침략한 제국주의의 한 형태다. 일본은 지금도 독도 문제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거론하며 제국주의를 품에 안고 있다. 이는 제국주의를 버리지 않고 되살려내는 것으로 보인다는 점에서 문제다. 이런 이유에서 독립기념관의 역할은 일제의 침략과 통치, 이에 저항한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국민께 교훈을 주고 일깨우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독립기념관은 지난 정부 때 불미스러운 일들로 국민의 눈총을 샀다.
▶역사인식의 문제라고 본다. 흔히 역사는 '있는 그대로 쓰면 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역사가들은 과거에 있던 사실을 있는 그대로만 쓰진 않는다. 조작한다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발생한 사실과 함께 '평가'를 덧붙인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세계를 처음 일주한 것으로 알려진 마젤란을 누군가는 '위대한 개척자'라고 평가하고, 누군가는 '침략자'라고 평가한다. 결국 역사는 누구의 눈으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는 문제다. 그래서 '역사 전쟁'이라는 말을 하는 것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열강이 인정하지 않아서 정부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제국주의 국가, 열강의 시각이다. 하지만 독립을 위해 투쟁한 쪽에서 보면 그렇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의 광복이 제2차 세계대전 일제 패전의 산물'이라는 주장은 주체성 없는 역사관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지적할 수 있다. 주인의식 없는 역사인식은 위험하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역사를 공부하고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역사인식을 둘러싼 갈등, 투쟁 현상은 앞으로도 이어질 것으로 보나.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정치는 역사를 상황에 따라 이용·활용하고 소환한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국제 정세와 국내 정치 판도에 따라 역사인식도 변화한다. 예를 들어 고려의 김부식은 다양한 자료를 수집해 비교적 합리적 관점으로 국가 차원의 삼국사기라는 방대한 역사서를 편찬했다고 평가받지만, 단재 신채호 선생은 신라를 중심으로 역사를 서술한 김부식을 '민족의 기를 꺾은 사대주의자'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신채호에게 민족은 무너지는, 무너진 국가를 되살리는 근거였기 때문이다. 이후 역사가들은 광복 이후 영웅, 민족에서 인권, 국민 등 보편적이고 열린 주제로 시선을 옮겼다.
앞으로도 역사인식은 국내외 정세가 변할 때마다 논쟁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특히 남북이 통일된다면, 통일 이후 독립운동사를 보는 시각이 지금과 많이 달라질 것이라고 예상한다. 이는 옳고 그름, 좋다 나쁘다의 문제가 아니다. 시기와 정세, 판도에 따라 달리지는 것이 역사인식이기 때문이다.
-취임 일성으로 '기념관의 정상화'를 꺼냈고 그로부터 100일 가까이 흘렀다. 지금까지 어떤 변화가 나타났나.
▶독립기념관의 정상화라는 것은 사실 그간 없었던 어떤 조치를 취해서 얻어지는 것이라기보다는, 이 기념관이 왜 만들어졌는가를 제대로 알고 그 설립 목적에 맞춰 길을 지켜나가는 것이 곧 정상화라고 말할 수 있다.
일본의 역사 왜곡으로부터 '역사 지키기로 나라를 지켜야겠다'는 일념으로 초등학생부터 온 국민이 성금을 모아 이 기념관을 세웠다. 자랑스러운 우리의 독립운동사를 확립하고 이를 국민께 알리면 되는데, 그 가치를 훼손하고 짓밟는 발언을 하는 것은 그 자체로 정상이 아니다. 출발할 때의 초심과 목적으로 가면 기념관은 자연스럽게 정상 운영이 되는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최근 언론에서 '독립기념관이 잘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지 않고 있으니 정상화된 것 아닐까?(웃음) 또, 기념관의 정규직 해설사들이 국민들로부터 받는 항의가 없어져서 일이 다시 좋아졌다고 말하는 것도 관장으로서 보는 중요한 정상화 신호다. 해설사들은 국민과 최일선에서 만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지 알 수 있는 지표라고 생각한다.
-국가보훈부에서 국외 보훈사적지 전수조사를 시작했다. 독립기념관은 어떤 역할을 맡나.
▶해외 독립운동사적지의 70% 이상이 중국 관내와 만주 지역에 분포해 있다. 1992년 한중수교를 계기로 해외 사적지가 우리에게 크게 다가오기 시작했다고 말할 수 있다. 김대중 정부 때 국외 사적지 조사를 조금씩 시작했고, 노무현 정부가 들어서면서 본격화했다. 그때 우리 기념관 산하 연구기관인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가 주축을 맡았다. 제가 2004~2006년 이 연구소 소장을 맡았을 때 해외사적지 700여 곳을 조사해 보고서를 내고 홈페이지에 공개했다. 그간 추가 조사를 거쳐 현재 총 1032곳의 해외사적지를 온라인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재명 대통령이 올해 중국 상하이를 다녀오면서 해외 사적지에 대한 관심을 드러냈고, 전수조사의 필요성이 거론되면서 올해부터 1032곳에 대한 2차 전수조사를 시작했다. 과거의 여의도가 현재의 여의도와 다르듯 해외 사적지도 마찬가지다. 현지의 발전 속도가 워낙 빨라 사적지도 발전에 따른 개발 혹은 변화를 피할 수 없는 실정이다. 그래서 보훈부 사업으로 전수조사가 결정됐고, 그간 조사와 데이터를 축적해 온 기념관 산하 연구소가 3년 계획으로 이번 조사를 맡게 됐다.
-보훈부는 독립운동가 서훈 재평가 작업도 준비하고 있다. 10여 명의 독립운동가를 우선 심사 대상자로 고려하는 모양새다. 독립운동사 연구자이자 유관기관의 장으로서 어떻게 지켜보고 있나.
▶결코 만만하지 않고, 쉽지 않은 일이다. 학술적 관점에서 독립운동가들은 재평가하지 않아도 될 만큼 충분한 연구가 이뤄졌다. 그래서 서훈 등급을 상향하는 것은 좀 다른 관점에서 볼 문제다. 서훈 등급 체계가 3등급에서 7등급(건국훈장 5개 등급 + 건국포장, 대통령표창)으로 바뀌면서 1963년 첫 포상을 시작으로 초창기에 서훈한 인사들의 훈격이 너무 낮다는 인식이 확산해 왔다. 다만 독립운동가 서훈은 한 번 결정되면 이후에 단 한 번도 바꾼 일이 없고, 재심사를 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다. 앞서 홍범도 장군, 유관순 열사, 여운형 선생의 서훈 상향은 특별법 등을 통해 이뤄진 것이지 독립유공자 공적심사위원회를 거쳐 이뤄진 것이 아니다.
재심사는 기회균등 문제와 직결된다. 일부 독립운동가만 우선 심사한다면 '댐이 터지듯' 이어질 다른 후손들의 반발이 불가피할 것이다. 또 독립장(3등급) 포상자를 대통령장(2등급)으로 승격할 경우, 다시 대한민국장(1등급)으로 높여달라고 요구하는 상황도 발생할 수 있다. 이미 애국장(4등급)과 애족장(5등급) 수훈자들의 재심사 요구도 이어지고 있다. 전면 재심사를 진행한다면 현재 1만 7000여 명의 포상자를 재심사해야 하니 10년을 들여도 힘들 것으로 보인다. 소수의 독립운동가를 우선 심사한다면, 앞으로 닥쳐올 댐 터치는 형국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지 대책도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
-독립운동가 서훈 재평가와 함께 동학농민운동 참여자를 국가유공자로 예우해야 한다는 주장과,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에 대한 재평가 문제도 거론된다.
▶동학농민운동 때 2차 봉기는 항일 투쟁의 성격이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그것을 독립운동이라고 평가하는 문제를 두고 학계에서 견해가 크게 엇갈리고 있다. 현재 독립유공자 공적심사위원회에서 이 문제를 계속 살피고 있는 것으로 안다.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서훈 기준은 2005년 마련돼 처음 포상한 이후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 중 자진 월북자, 특히 북한 정부 수립에 참여하고 기여한 인물의 서훈 문제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국민 공감대 형성부터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남북한의 관계가 크게 변화하거나, 통일 이후에야 본격적인 논의가 이뤄지지 않을까 싶다.
-김 관장의 연구와 행적 곳곳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빠지지 않는다. 임정을 향한 관심과 각별함은 언제 시작됐나.
▶중학교 2학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는 다섯 식구가 남의 집 한켠에 작은 단칸방을 직접 만들어 더부살이하고 공부와 아르바이트를 병행해야 할 정도로 어려운 도시 빈민이었다. 그 어려운 시절 나를 붙들어 준 기둥이 '백범일지'였다. 중학교 2학년 때 선생님의 권유로 헌책방에서 백범일지를 구해 읽었는데, 그때부터 마음가짐이 달라졌고 민족 문제에 눈을 떠 독립운동사를 공부하게 됐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1999년 백범김구전집 편찬위원이 되고, 김대정 정부 임기 말 개관한 백범기념관에서 전시도 맡았다. 또 좋은 기회를 맞아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건립위원이 되고 초대 관장도 맡게 됐다. 연구자로서는 참으로 행복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인문학 중에서도 역사학계에는 유독 사회와 타협하지 않고 올곧게 나아가야 한다는 인식을 가진 이들이 많다. 40년 넘게 연구자로 살아왔지만 그중 20년 정도는 역사의 대중화를 위해 보낸 시간이라는 점에서 순수한 연구자들, 선배 연구자들은 날 '파계승'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래도 저는 연구자라고 불릴 때 가장 행복하다.
-임시정부사 연구자에서 이제는 독립운동사 전반을 국민께 알리는 기관장이 됐다. 국민의 이해를 높이기 위해 어떤 사업을 준비하고 있나.
▶'인문학의 위기'가 거론될 때 돌파 방법으로 '대중화'를 생각했다. 우리 독립운동사의 내용과 가치를 보다 국민께 쉽게 알리고 대중화할 방법을 고민하고 있다. 독립운동사 자료는 90% 이상이 문서자료로, 상당수 내용은 외국어이기도 하거니와 그 내용도 난해하다. 과거에는 이 문서들을 전시하는 데 치중했다면, 지금은 문서 속 핵심 키워드를 어떻게 시각화, 형상화할 것인지를 고민하고 있다.
백범일지에는 김구 선생이 "만일 누가 어떤 모양으로 죽는 것이 네 소원이냐 한다면 나는 최대한 욕망은 독립이 다 된 날 본국에 들어가 영광의 입성식을 한 뒤에 죽는 것이지마는, 적어도 미주와 하와이에 있는 동포들을 만나보고 오는 길에 비행기 위에서 죽어서, 내 시체를 던져 그것이 산에 떨어지면 날짐승 길짐승의 밥이 되고, 물에 떨어지면 물고기의 뱃속에 영장하는 것이다"라고 기술한 대목이 있다.
임시정부가 돈이 없어 힘들고 어려울 때 미주 동포들이 한두푼 모아 보내준 자금이 이봉창, 윤봉길 의사의 의거에 쓰였다. 김구 선생의 저 언급은 그 동포들이 너무 고마워서 동포들을 직접 만나 그 감사함을 다 표현하고 돌아오다가 삶을 마쳐도 영광스러운 일이라는 뜻이다. 글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이런 내면의 생각과 그 의미를 어떻게 시각적으로 전달할지 고민하는 것이 요즘의 일이다.
-내년이면 독립기념관 개관 40주년이다. 이에 맞춰 계획하고 있는 특별전시나 사업을 소개한다면.
▶탄생부터 지금까지 독립기념관과 함께한 국민들의 삶을 전시하고 싶다. 이곳에 독립기념관을 세우기 위해 삶의 터전을 떠난 이주민들이 있다. 또 기념관 건립을 위해 성금을 낸 국민들도 있다. 또 과거에는 전국에서 독립기념관으로 수학여행을 왔고 연간 600만 명이 방문하기도 했다. 그때의 학생들이 이제는 자녀를 보고 손주까지 볼 나이가 됐다. 이렇게 독립기념관과 함께한 국민들의 옛 사진, 성금 증서와 같은 자료를 모아 '이제는 손주들, 자녀들 손잡고 다시 방문하자'는 메시지를 내고 싶다.
또 교육부로부터 종합교육연수원 인가를 받는 것도 하나의 목표다. 1년 내내 전국의 교사, 학생, 장병, 공무원까지 연수하면서 독립운동의 내용과 가치를 알릴 최고의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아울러 독립기념관이 전국 90여 개 독립운동 관련 박물관, 기념관을 끌어안고 구성원들의 역량을 강화하는 협력망 구축 사업을 시작하는 것도 목표다. 대다수 소규모 기념관에는 전문 학예사가 없기 때문에 현재 일하는 관계자들의 역량을 강화하고, 전시 노하우도 전수하며 각 전시관의 역량을 키우자는 구상이다.
-개관 40년인 만큼 독립기념관에서 모은 자료의 규모도 상당할 것으로 보인다. 자료 보전을 위해 품이 많이 들 것 같다.
▶40년이 흐르면서 기념관 안에 손질할 곳이 많아졌다. 일단 수장고 리모델링 사업을 시작한 상황이다. 기념관이 수집한 자료가 약 11만 점에 달한다. 중요 희귀본을 비롯한 책은 14만 권에 달한다. 처음 기념관을 만들 때 이만큼 자료가 쌓일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서고도 수장고도 부족한 상황이다. 100년쯤 뒤 이 자료들은 국보, 보물급이 될 것이다. 이걸 어떻게 잘 간직하고 미래세대에 전할 것인가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국민께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기념관이 상당 기간 국민들께 걱정거리였던 때가 있었던 만큼 이제 기대도 클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튀는 일을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처음 개관할 때의 목적대로 차분하게, 밭을 갈고 퇴비 주고 씨 뿌리는 일을 해나가겠다.
☞김희곤 독립기념관장은
1954년 경북 대구시(현 대구광역시)에서 태어났다. 경북고등학교를 나와 경북대학교 문리과대학(인문대학) 사학과에 입학해 동대학원에서 1980년 석사학위를 받고 1991년 '상해지역 한국독립운동단체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88년 국립안동대학교(현 국립경국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부임해 2019년까지 연구와 후학 양성에 매진했다.
2004~2006년 독립기념관 산하 독립운동사연구소장을 지냈다. 2007년부터 안동독립운동기념관 초대 관장, 2014년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안동독립운동기념관이 개편) 초대 관장을 맡아 2020년까지 경북지역 독립운동사의 대중화에 힘썼다. 2018년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건립위원에 위촉돼 2022년부터 초대 관장을 지냈고 올해 4월 13일부로 제14대 독립기념관장에 임명됐다. 다양한 연구 및 전시 성과와 독립운동 관련 풍부한 기관장 경험으로 조직 운영과 경영 능력을 두루 갖춘 인사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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