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라크리쉬난의 이례적 외교 행보…7월 ARF서 북미 대화 재개 조짐?
중국·북한·한국 찾는 이례적 외교 행보 속 北에 "대화 열어둬야" 촉구
방한해 외교·통일 장관 만났지만 '깜깜이 행보'…정동영 "대화 내용 비밀"
- 노민호 기자, 김예슬 기자, 유민주 기자
(서울=뉴스1) 노민호 김예슬 유민주 기자 = 지난 24일부터 중국·북한·한국을 차례로 방문한 비비안 발라크리쉬난 싱가포르 외교장관의 행보가 심상치 않다. 북한에게는 "대화와 교류의 채널을 열어두라"라고 촉구하며 최선희 외무상을 오는 7월 열리는 다자회의에 초청하고, 한국을 찾아서는 '깜깜이 행보'로 북한과 나눈 대화 내용을 전혀 공개하지 않는 행보를 보였다.
일각에서는 중국과 북한, 한국을 찾는 이례적 행보를 보인 발라크리쉬난 장관이 북미 대화와 관련한 '모종의 역할'을 맡은 것 아니냐는 관측을 28일 제기하고 있다.
발라크리쉬난 장관은 방한에 앞서 지난 26일 평양에서 최 외무상을 만나고, 27일엔 북한의 공식 서열 2위이자 김정은 노동당 총비서의 '비서실장'이라는 별명을 가진 조용원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우리의 국회의장 격)을 만나 환담했다.
발라크리쉬난 장관은 특히 오는 7월 말 필리핀에서 열리는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에 최 외무상을 초청했다. 미국, 중국, 일본 등 주요국 외교장관이 모두 참석하는 ARF는 북한도 공식 참가 자격이 있는 다자회의체지만, 북한은 트럼프 행정부 1기 때인 2019년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의 결렬 이후 외무상을 보내지 않고 있다. 발라크리쉬난 장관이 사실상 북한의 ARF '복귀'를 요청한 것이라는 해석이 나오기도 한다.
북한의 '호응' 여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지만, 싱가포르 외교부가 발라크리쉬난 장관이 최 외무상을 초청한 것을 공식 발표하고, 북한에게 "역내 국가들과 교류와 대화의 문을 열어둘 것"을 요청했다는 사실을 공개한 것은 북한과의 공감대가 없으면 어렵다는 해석도 나온다.
실제 북한의 노동신문은 발라크리쉬난 장관이 조용원 상임위원장과 만나 "친선적 분위기 속에서 담화했다"라며 우호적인 보도를 냈다. 발라크리쉬난 장관의 입국, 출국 보도까지 상세하게 챙기며 그를 예우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북한과 싱가포르는 당면한 특별한 양자 현안이 없기 때문에, 발라크리쉬난 장관이 중국에 이어 방북한 정확한 이유는 아직 파악되지 않는 상황이다. 특히 올해 ARF는 싱가포르가 아닌 필리핀에서 열리기 때문에, 발라크리쉬난 장관이 최 외무상을 초청한 것은 양자 현안 논의 외에 다른 이유가 있는 이례적인 행보라는 분석이 나온다. 지난 2018년 북미 정상회담이나, 2009년 남북의 '비밀 접촉'을 주선한 외교적 경험을 살리기 위한 것이라는 관측이다. 발라크리쉬난 본인이 지난 2018년 6월 싱가포르에서 열린 북미 정상회담 때 주요 역할을 한 경험이 있다.
다만 싱가포르가 내년 ARF 등 ASEAN 관련 회의를 주재하는 순회 의장국이기 때문에, 이번 '초청'이 올해가 아닌 내년 회의를 의식한 것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발라크리쉬난 장관은 방북 직후인 지난 27일 서울에 도착해 28일 조현 외교부 장관과 정동영 통일부 장관을 만났다. 외교부는 두 장관의 회담과 관련해 '북한과의 대화 요건 조성 방안' 등을 비롯한 현안을 논의했다고 밝혔다.
통일부는 그러나 정 장관과 발라크리쉬난 장관의 만남 자체를 비공개로 진행했다. 회동 장소까지 언론에 알리지 않은 '비공식 만남'에 가까운 방식이었다.
정 장관은 발라크리쉬난 장관을 만난 직후 기자들과 마주친 자리에서 "서로 (회담) 내용을 공개하지 않기로 했다"라며 극도로 조심스러운 모습을 보였는데, 평소 북한 및 한반도 관련 현안에 대해 적극적인 입장을 표하던 모습과 큰 차이가 있었다.
그러면서도 정 장관은 "싱가포르의 건설적 역할에 대해 대단히 감사하게 생각한다"라고 발언해 눈길을 끌었다. '건설적 역할'은 정부가 남북 혹은 북미 대화에 대한 중국의 역할을 촉구할 때 사용하는 외교적 수사로, 정 장관의 발언을 두고 발라크리쉬난 장관이 싱가포르의 '중재자 역할'에 대한 입장을 전달한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기도 했다.
이날 발라크리쉬난 장관은 기자들로부터 어떤 질문도 받지 않았다. 외교·통일 장관과의 면담 외에 방한 중 다른 일정도 확인되지 않고 있다.
싱가포르는 북한과 1975년 수교를 맺었고, 자국 내에 북한 대사관도 두고 있는 등 비교적 원만한 관계를 맺고 있다. 싱가포르 외교부에 따르면 이번 방북도 최 외무상의 요청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싱가포르의 '중재자' 역할을 가늠할 수 있는 관건은 한반도 사안 관련 싱가포르와 미국, 중국 등과의 소통 여부다. 싱가포르가 한반도 사안 관련 '어떤 역할'을 맡는 것에 대해 미·중과도 소통했는지, 싱가포르의 자발적 외교 행보인지에 따라 무게감은 달라질 수 있다.
경제·외교적으로 미국과 가깝고, 지리적으로 중국과 가까운 싱가포르는 미·중 경쟁의 심화 이후 양국 사이에서의 '생존'을 위한 외교의 필요성을 크게 느끼고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이런 배경에서 북미 대화 주선을 통해 싱가포르가 미·중 사이에서 나름의 해법을 찾으려는 시도를 하는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ntiger@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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