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 군비백서 '한반도 비핵화' 사라져…北은 '미소', 韓에는 '변수'
北 입장선 핵 포기 안 해도 中 우군 유지 '심리적 안전판' 얻어
한미 CVID 슬로건 '고립화' 우려…美 NSS서도 비핵화 문구 빠져
- 김예슬 기자
(서울=뉴스1) 김예슬 기자 = 중국이 19년 만에 발표한 군비백서에서 '한반도 비핵화' 표현을 빼면서 북한의 핵 보유 노선을 둘러싼 역내 전략 구도가 새로운 전환점을 맞았다는 관측이 7일 나온다. 북한 입장에서는 핵무력 보유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는 듯한 중국의 태도 변화를 등에 업고 '핵보유국 상수화'에 속도를 낼 수 있지만, 한반도 사안에 대한 중국의 건설적 역할이 필요한 한국 입장에선 '변수'로 작용할 전망이다.
중국 국무원은 지난달 27일 '신시대 중국의 군비 통제·군축·비확산' 백서를 공개했다. 이는 2005년 백서를 갱신한 후속 문서다. 2005년 백서는 ‘한반도 등에 비핵지대를 설립한다는 주장을 지지한다'며 한반도 비핵화를 분명한 목표로 명시했지만, 이번 백서에서는 해당 문구가 통째로 빠졌다. 대신 '한반도 문제의 정치적 해결'과 '한반도의 평화·안정·번영' 등 원론적 문구만 반복됐다.
이 같은 표현 변화는 중국이 더 이상 '비핵화'를 전면에 내세워 북한을 압박하기보다는, 미중 전략 경쟁과 한반도 정세 관리 속에서 북핵을 '관리 가능한 현실 변수'로 인식하는 데 무게중심을 옮긴 것 아니냐는 해석을 낳는다. 실제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 등은 중국이 북한의 핵무장을 "암묵적으로 인정한 것 아니냐"는 관측을 전했다.
북한 입장에서 이번 조치는 단순한 표현 조정이 아니라, 자신들이 수년간 밀어붙여 온 '핵보유국 노선'을 주변 강대국이 사실상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는 신호로 읽을 여지가 크다.
북한은 2022년 '핵무력 법제화'에 이어 2023년 최고인민회의에서 헌법에까지 "핵보유국 지위는 불가역적"이라는 취지의 조항을 명시하며, 비핵화 협상 자체를 부정하는 단계로 올라섰다. 올해 들어서도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은 "우리의 핵보유국 지위는 되돌릴 수 없다"며 외부 압력으로도 핵 노선을 바꾸지 않겠다는 입장을 거듭 천명했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이 군비·군축 백서에서 '한반도 비핵화' 문구를 지운 것은, 북한 정권 입장에선 '핵을 포기하지 않아도 중국과의 전략적 관계를 유지·강화할 수 있다'는 심리적 안전판을 제공하는 효과를 낳을 수 있다. 북러 밀착과 더불어 북중관계도 정상외교·경제·군사 협력이 복원되는 흐름 속에서 평양이 체감하는 '전략적 후방'은 오히려 두터워졌다는 평가다.
임을출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북한이 자위력 강화를 위해 핵무력을 만드는 것에 대해 중국이 공식적으로 인정한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실질적으로는 암묵적 인정 분위기가 굳어지는 국면"이라며 "중국 입장에선 북한의 핵 보유가 결코 바람직하지 않고 실익도 크지 않지만, 지금의 국제정세가 북한 비핵화를 강하게 요구하기 어려운 환경이라는 인식이 반영된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 대외 선전에서도 '책임 있는 핵보유국' 이미지를 강조하는 담론이 더욱 강화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북한은 이미 유엔과 국제사회에 대해 "비핵화 요구는 곧 우리 국가의 주권과 존재를 포기하라는 것"이라는 논리를 펴고 있다. 여기에 중국이 비핵화를 문서에서 후퇴시키게 되면서 북한은 "현실적인 해법은 비핵화가 아니라 핵보유를 전제로 한 평화체제"라는 주장을 더욱 노골적으로 밀어붙일 수 있게 된다.
전문가들은 중국의 이번 조치를, 북핵 문제에 대한 입장을 한 단계씩 '느슨하게' 가져온 흐름의 일환으로 보기도 한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교 석좌교수는 "중국의 입장 변화를 3단계로 볼 수 있다"며 "첫 번째는 한미일 대 북중러 신냉전 구도가 굳어지면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대북제재에 대해 중러가 더 이상 적극 동참하지 않고 '제재 무용론'을 들고 나온 시기"라고 짚었다.
양 석좌교수는 "두 번째는 한중 정상회담 등 공식 외교 문서에서 북한 비핵화 표현이 점차 사라지고, 모호한 한반도 문제 해결 같은 표현으로 대체되기 시작한 것"이라며 "세 번째가 이번 군비·군축 백서에서 아예 한반도 비핵화라는 용어를 빼버린 조치로, 중국이 전략적 문구 선택을 통해 입장을 관리하고 있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즉, 중국이 겉으로는 남북 사이 '중립적 조정자' 이미지를 유지하면서도, '적극적 관여' 및 성과 도출이 어려운 북핵 문제에 대한 제약을 스스로 줄여가는 모습이라는 분석이다.
문제는 이러한 흐름이 한미 양국이 오랫동안 유지해 온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CVID)' 기조를 더 고립된 슬로건으로 만들 수 있다는 점이다.
북한이 협상 테이블에 앉기 위해선 핵보유국 지위를 인정해야 한다는 전제를 계속 내세우고, 중국이 비핵화 언급을 자제하는 국면에서는, 한미 양국 모두 북한과의 협상에서 요구할 수 있는 목표와 수단이 대폭 제한되는 측면이 있다.
구체적으로 '부분 동결·실험 중단' 등 축소된 단계적 합의가 논의되더라도, 기존 CVID 원칙을 지키려는 한미 양국의 입장은 오히려 고립될 수 있고, 북한은 중국을 뒷배로 더 높은 조건을 요구할 여지가 커진다는 지적이다.
새로 발표된 미국의 국가안보전략(NSS)에서도 북한과 비핵화 관련 표현이 빠지면서, 미국조차 사실상 북핵을 장기 관리 대상 정도로 인식하는 것 아니냐는 관측도 제기된다. 2017년 NSS가 '한반도의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를 명시하고, 2022년 바이든 행정부 NSS도 한반도 비핵화를 향한 외교적 노력을 강조했던 것과 비교하면 뚜렷한 대비를 이룬다.
yeseul@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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