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독부 전시 강제동원…도망갈 곳 없었던 日사도 광산 조선인들
태평양 전쟁 때 1200여명 동원 추정… 10명 이상 사망
홍보 책자엔 관련 내용 쏙 빠져… '제2의 군함도' 우려
- 장용석 기자
(서울=뉴스1) 장용석 기자 = 일본 정부가 일제강점기 조선인 징용자들의 통한이 서려 있는 사도 광산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하기 위한 절차를 진행 중이다.
이런 가운데 사도 광산이 일본의 계획대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을 등재될 경우 2015년 등재된 나가사키현 하시마, 일명 '군함도'처럼 과거사 왜곡 현장으로 악용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사도 광산은 일본 니가타현 앞바다 사도가섬에 있는 광산으로서 에도시대엔 일본 최대의 금광이었다. 1868년 메이지 유신 뒤 일본 정부가 소유했던 사도 광산 소유권은 1896년 미쓰비시 합자회사가 인수했고, 1918년엔 미쓰비시광업(현 미쓰비시 머티리얼)으로 그 관리권이 넘어갔다.
그리고 1967년 일본의 사적을 지정된 사도 광산은 1989년 광산 고갈에 따라 채굴이 중단됐고, 현재는 관광지로서의 역할만 하고 있다.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지난 2019년 펴낸 사도 광산 강제동원 관련 진상조사 보고서를 보면 일본은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0년대에 약 1200명의 조선인을 사도 광산 광부로 동원했다. 가족까지 합하면 당시 섬에 있었던 조선인은 1300여명 정도로 추정된다.
그러나 일본 측은 사도 광산의 세계유산 등재 추진 과정에서 만든 홍보책자에 에도시대 이후 광산의 역사를 소개하면서 이 같은 '조선인 강제동원' 사실은 수록하지 않았다.
사도 광산의 조선인 강제동원이 진행된 건 1939년부터로 파악되고 있다. 1931년 만주사변과 1937년 중일전쟁을 거쳐 본격적인 침략전쟁 국면에 접어든 일본이 금을 군수물자 수입대금으로 쓰기 위해 금광 채굴량을 늘린 시기와 일치한다.
이 당시 일본은 이른바 '할당 모집' 방식으로 조선인들을 사도 광산 광부로 동원했다. '할당 모집'이란 당시 조선총독부가 시행한 강제동원 방법의 하나로서 일본 기업들의 요청에 따라 지역별로 미리 인원수를 정해놓고 그 수를 채울 때까지 노무자들을 동원·송출한 것을 말한다.
1940년 2월~1942년 3월 사도 광산 광부로 동원된 조선인 1005명 가운데 148명이 '도주'했다는 기록 또한 당시 조선인 동원의 강제성, 즉 이들이 마음대로 현장을 벗어날 수 없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다.
재단에 따르면 기록상엔 이들 1005명의 조선인 가운데 사망자는 10명으로 기재돼 있으나, 그 뒤 이후에도 강제동원이 계속된 데다 기록에서 누락된 사망자도 존재하는 것으로 파악돼 실제론 더 많은 조선인이 사도 광산에서 목숨을 잃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례로 1942년 12월 사도 광산 갱내에서 떨어진 돌에 맞아 두개골 파열로 숨진 조선인 김모씨 등 2명은 이 '사망자 10명'에 포함돼 있지 않다.
재단은 당시 '할당 모집'으로 사도 광산에 들어간 조선인들은 3년 기한을 채운 뒤에도 광산 측의 '전원 계속 취로' 방침 때문에 귀국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고 설명했다.
사도 광산엔 일본인 노동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착암부·운반부 등 특별한 기술을 필요로 하지 않는 대신 상대적으로 위험도가 큰 일은 조선인이 담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인들도 사도 광산에서 일한 대가로 월급을 받긴 했으나, 작업에 쓰는 도구 비용과 각종 보험료 등이 공제됐기에 실수령액은 기록상 임금액엔 못 미쳤을 것이란 게 관련 전문가들의 일반적인 평가다.
특히 사도 광산에선 조선인들에게 현금 소지를 금지하고 '강제 저축'토록 했다고 한다. '강제 저축'은 당시 일본이 전비(戰費)를 충당하고 노무자 도주를 막기 위해 다른 강제동원 현장에서도 일반적으로 사용했던 방식이다.
재단은 보고서에서 "전시체제기 노무자들은 노동자가 아니었기에 노동자 권리를 주장할 수도 없었다. 모든 처우는 일본이 일방적으로 결정했다"며 "임금을 받았다는 이유로 강제성을 부정하는 일부 주장은 당시 체제와 시대 상황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일본 공안당국 자료를 보면 사도 광산에선 1940년 2월과 4월 등 2차례에 걸쳐 급여·대우 등에 불만을 가진 조선인들의 파업 등 소요가 있었다. 1942년 11월~1943년 5월엔 조선인들이 현장을 탈출하다 검거된 사건도 5건 있었다.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패전한 1945년 8월15일 당시 사도 광산에 적을 두고 있던 조선인은 전쟁 말기 다른 지역으로 전근 갔던 인원까지 포함해 570여명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들은 '조국 광복'에도 곧바로 귀국하지 못한 채 광부 일을 계속해야 했다.
사도 광산의 조선인들이 귀국선에 오른 건 니가타현 내 다른 군수공장에서 동원됐던 조선인들이 귀국이 끝난 1945년 12월부터였다.
이런 가운데 우리 정부는 지난 28일 외교부 대변인을 통해 사도 광산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철회를 일본 측에 공식 요구했다. 같은 날 외교부는 추조 가즈오 주한일본대사관 공보문화원장도 초치해 사도 광산의 세계유산 등재 추진에 항의하고 우리 정부의 입장을 전달했다.
ys4174@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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