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전증 치료의 '블랙박스' 열렸다…AI가 약물 반응 읽는다

서울대병원, 2600명 데이터 분석…"AI, 의료진 판단 보조 역할로 활용"
발프로산은 전신 경련, 라모트리진은 고령 발병·짧은 유병 기간

서울대병원 신경과 박경일·이상건 교수(왼쪽부터), 융합의학과 김영곤 교수(서울대병원 제공)

(서울=뉴스1) 김규빈 기자 = 서울대병원 연구진이 인공지능(AI)을 활용해 뇌전증 환자에서 항경련제 치료 반응을 치료 시작 전에 예측할 수 있다는 분석 결과를 확인했다. 대규모 임상 데이터를 기반으로 약물별 반응성을 구분할 수 있다는 점에서, 반복적인 약물 변경에 따른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는 가능성이 나온 셈이다.

서울대병원은 박경일·이상건 신경과 교수와 김영곤 융합의학과 교수 연구팀이 뇌전증 환자의 초기 임상 정보를 학습한 머신러닝 모델을 통해 주요 항경련제에 대한 치료 반응을 예측하는 분석을 수행한 결과 이같이 나왔다고 9일 밝혔다.

뇌전증은 특별한 원인 없이 경련이 반복되는 신경계 질환으로, 현재 20종이 넘는 항경련제를 치료제로 쓰고 있다. 그러나 환자마다 약물 반응이 달라 어떤 약물이 효과적일지는 실제로 투약해 보기 전까지 알기 어렵다. 이 때문에 효과가 없을 경우 약물을 교체하고 경과를 다시 관찰하고 있으며, 환자 10명 중 약 3명은 두 차례 이상의 약물 조정에도 반응하지 않는 난치성 경과를 보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연구팀은 이러한 임상적 한계를 해결하기 위해 치료 초기 단계에서 약물 반응을 예측할 수 있는 도구의 필요성에 주목했다. 연구에는 2008년부터 2017년까지 서울대병원에서 진료받은 뇌전증 환자 2600여 명의 임상 데이터가 활용됐다. 해당 코호트는 아시아 단일기관 기준 최대 규모의 뇌전증 환자 자료로, 최소 3년 이상의 장기 추적 관찰 정보가 포함됐다.

분석에 사용된 데이터에는 항경련제 처방 이력, 경련 유형, 발병 연령, 유병 기간, 뇌 MRI와 뇌파 검사 결과, 혈액검사 수치, 치료 경과 등 총 84개의 임상 변수가 포함됐다. 연구팀은 이 변수들을 바탕으로 트리 기반 앙상블 분석 기법을 적용한 머신러닝 모델을 구축했다. 치료 반응성은 항경련제 투여 후 경련 빈도가 50% 이상 감소한 경우로 정의했다.

항경련제별 분석 건수와 머신러닝 모델을 이용한 치료 반응 예측력(AUC) 비교(서울대병원 제공)

모델 분석 결과, 단일 항경련제 요법 가운데서는 발프로산(AUC 0.686), 라모트리진(0.674), 옥스카르바제핀(0.633) 순으로 치료 반응 예측력이 높게 나타났다. 병용요법 중에서는 카르바마제핀과 레비티라세탐 병용 요법(CBM+LEV)이 가장 높은 예측력(AUC 0.764)을 보였다. 이는 특정 환자군에서 약물 조합에 따라 치료 반응을 보다 정밀하게 예측할 수 있음을 뜻한다.

연구팀은 예측 결과의 해석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샤플리 가산 설명법(SHAP)을 적용했다. 이는 AI 모델이 어떤 변수를 근거로 예측에 도달했는지를 수치로 보여주는 분석 기법이다.

그 결과, 전신 강직간대발작을 동반한 환자는 발프로산에 대한 치료 반응 가능성이 높았고, 발병 연령이 높거나 유병 기간이 짧은 환자는 라모트리진에 대해 반응을 보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항경련제 선택이 단순히 경련 유형뿐 아니라 환자의 임상적 맥락 전반을 고려해야 한다는 점을 의미한다. 연구팀은 동일한 진단명을 가진 환자라도 약물 반응을 결정짓는 요인이 서로 다를 수 있음을 데이터로 확인했다고 설명했다.

박경일 교수는 "뇌전증 환자의 항경련제 선택은 그동안 전문의의 경험적 판단에 의존해 온 측면이 컸다"며 "이번 연구는 장기간 축적된 대규모 코호트와 다양한 임상 변수를 바탕으로, 약물 반응을 사전에 가늠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이상건 교수는 "이번 모델은 실제 진료 현장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임상 정보만으로 예측이 가능하다는 점이 강점"이라며 "AI가 치료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의료진의 판단을 보조하는 역할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연구진은 다만 단일 기관 코호트라는 한계가 있는 만큼, 다른 의료기관과 다양한 인구 집단에서의 외부 검증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또한 약물 반응 예측 결과를 실제 치료 성적 개선으로 연결하기 위해서는 전향적 임상 연구가 필요하다는 점도 함께 언급했다.

한편 이번 연구 결과는 국제학술지 '사이언티픽 리포트(Scientific Reports)' 최신 호에 게재됐다.

rnkim@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