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자 자립의 의미와 가치 [김현정의 준비된 노후]

김현정 서울대 치의학대학원 교수(대한디지털헬스학회 이사장)

김현정 서울대 치의학대학원 교수(대한디지털헬스학회 이사장)

자립은 스스로 결정하고 선택할 힘을 뜻한다. 장기요양보험의 핵심 가치 역시 자립 지원이다. 나이가 들수록 자립의 가치는 더 커진다. 신체 기능이 떨어지고 소득이 줄어드는 시기일수록, "내가 나를 돌볼 수 있다"는 생각과 느낌은 삶의 질을 지키는 최소한의 안전망이다. 문제는 고령자를 복지 수혜의 대상으로만 생각하는 것이다. 자립은 개인의 노력에 더해 생활환경·제도·지역사회의 뒷받침이 함께 만들어 가는 사회적 성과다.

자립의 시작은 일상 기능의 유지다. 스스로 씻고, 먹고, 닦고, 움직이며, 약을 챙길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젊을 때부터 건강관리와 올바른 일상의 생활습관이 중요하다. 구강건강은 자립에서 중요하다. 씹는 힘이 떨어지면 단백질 섭취가 줄고 근감소와 우울, 인지 저하 위험이 커진다. 구강건강이 나빠지면 흡인성 폐렴 위험이 커져 입원과 사망으로 이어질 수 있다. 현장형 구강관리 표준과 구강관리 보완대체기기 활용이 더해지면 스스로 먹고 말하고 웃는 능력을 더 오래 지킬 수 있어 고령자의 자존과 삶의 질을 보다 오래 유지할 수 있다.

영양·구강관리·걷기·근력운동·균형훈련 같은 간단하지만 꾸준한 생활습관은 폐렴과 낙상을 줄여 자립 기간을 늘린다. 여기에 수면·정신건강 관리가 더해질 때 자립의 토대가 단단해진다.

일본 개호보험은 "존엄을 유지하고, 능력에 맞는 자립적 일상생활을 영위하도록" 설계돼 있고, 지역 돌봄과 예방 중심 지원이 촘촘하다. 자립은 도움을 거부하는 '완전 독립'이 아니라 지역사회 통합돌봄 속에서 스스로 결정하고 선택하는 상태다. 그 결과 65세 이상 고령자의 비율(2022년 기준)이 약 30%나 되는 일본의 건강수명은 평균 73.4세로, 한국의 65.8세보다 6년 이상 길다.

서울시가 '초고령사회 대응 종합계획'으로 발표한 '9988 서울 프로젝트'의 주요 내용. (출처: 서울시 '내 손안에 서울' 홈페이지)

지역사회는 고령자 삶의 현장이다. 가까운 공원과 작은 정원, 경로당과 도서관, 보건소와 의료기관, 동네 체육시설은 동선 안에 있어야 한다. 걸어서 닿는 거리의 서비스와 사회적 관계망이 고립을 줄이고 보다 많은 활동을 가능하게 한다.

복지 용구와 주거 환경도 자립을 가능하게 만든다. 푸시풀 손잡이, 미끄럼 방지 매트, 높낮이 조절 세면대, 욕실 안전 손잡이와 동선 설계는 낙상을 줄이고 일상 동작의 독립성을 높인다. 장비의 보급보다 중요한 것은 맞춤형 사용과 지속 사용이다. 특히 신기술 복지 용구들이 선정–설치–교육–점검–소모품 관리까지 한 묶음으로 제공될 때 장비는 비용이 아니라 자립을 만드는 사회적 투자로 전환될 수 있다.

건강 문해력은 자립의 언어이며, 디지털 기술은 자립의 촉진제다. 병의 이름보다 나의 검진 수치와 위험요인을 이해하고, 복용약과 식습관의 상호작용을 읽어내며, 검진·예방접종·치과 방문 일정을 스스로 관리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복잡한 의료·복지 정보를 한 문장으로 정리해 주고, 큰 글씨와 그림으로 안내하며, 디지털 문해력 증진 교육도 고령자의 자립을 지원할 수 있다. 일상에서의 건강 모니터링, 복약 알림과 낙상 감지, 돌봄 기록의 표준화는 고령자의 불안을 줄이고 가족과 돌봄 제공자의 부담을 덜어준다.

다만 데이터는 '불편을 줄이고 선택을 돕는' 선에서 쓰여야 한다. 과잉 알림과 복잡한 앱은 오히려 자립을 방해한다. 디지털 고령 친화 제품들은 사용이 단순하고 신뢰할 수 있는 기술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국가 R&D와 한국형 서비스 모델이 촘촘히 설계돼야 한다.

자립은 관계 속에서 자란다. 도와 달라 말할 수 있는 용기, 필요한 도움을 정확히 요청하는 기술, 서로의 속도를 맞추는 배려가 자립을 지킨다. 고령자의 결정권을 존중하는 가족, 과잉보호 대신 안전한 자기결정을 가능하게 하는 돌봄, 실패해도 다시 시도할 수 있게 옆에서 지켜보는 돌봄 생태계가 있을 때 우리는 더 오래, 더 건강하게 그리고 나답게 살아갈 수 있다.

결국 자립은 개인의 노력이 아니라 사회가 함께 만들어 내는 성과다. 법과 제도는 고령자의 자립을 권리로 보장하고, 지역사회는 걸어서 닿는 거리의 공원·보건소·의료기관·노인복지기관 등을 촘촘히 잇는다. 가정과 현장은 과잉보호 대신 '고령자의 안전한 자기결정'을 돕는다. 작은 일상의 습관—균형 잡힌 한 끼, 올바른 구강관리, 20분 걷기, 복약관리, 이웃과의 인사, 봉사활동 등—이 모여 오늘이 이뤄져야 한다. 고령자에게 자립은 과분한 요구가 아니라 우리가 보장해야 할 최소한의 사회적 약속이다.

ⓒ News1 김초희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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