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은 이미 치매였다 [김현정의 준비된 노후]

김현정 서울대 치의학대학원 교수(대한디지털헬스학회 이사장)

편집자주 ...초고령화 사회에 접어든 대한민국. 김현정 교수의 'AI와 함께 준비하는 건강한 나이 듦'을 주제로 한 이번 칼럼은 은퇴 후 황금 노후를 준비하는 어르신들에게 AI 시대 건강한 노후, 슬기로운 노후 준비를 위한 길라잡이가 되기를 바랍니다. 필자인 김현정 서울대 치대 교수는 서울대 의대를 졸업한 뒤 미국 하버드대에서 뇌신경과학 분야를 연구한 학자이며 대한디지털헬스학회 이사장으로 의료계와 학회에서 다양한 활동을 펼쳐왔습니다. 의학과 치의학 경계, 장애인 치과, 지역사회 구강돌봄의 현장에서 건져 올린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칼럼을 연재할 예정입니다.

김현정 서울대 치의학대학원 교수(대한디지털헬스학회 이사장)

고령자는 여든다섯을 넘기면서부터 눈에 띄게 기력이 쇠한다. 우리 어머님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 무렵 급히 걸어가던 중 척추골절을 겪었고, 전신마취와 진통제 투여 이후 경도인지장애 진단을 받았으나 다행히 회복되는 듯 보였다. 이후 우울장애와 망막변성이 겹쳤다.

가족에게 가장 먼저 와닿은 변화는 기억 상실이 아니라 '반복'이었다. 같은 질문을 몇 번이고 되풀이하셨고, 이미 여러 차례 들은 옛날이야기를 매번 처음 꺼내듯 하셨다. 가족들은 나이가 나이인 만큼 자연스러운 노화 과정으로 여겼다. 치매 가능성을 먼저 꺼낸 것은 해외에 거주해 일 년에 한두 달씩만 어머님을 돌보는 시누들이었다.

결정적인 사건은 지난 추석이었다. 오랜만에 온 가족이 모인 자리에서 어머님 돌봄을 맡아오던 간호사인 시누가 갑자기 억울함을 토로했다. 그 순간 분위기는 단숨에 얼어붙었다. "은행에 넣어둔 돈이 없어졌어. 분명히 있었는데." 어머님의 말씀이 뒤를 이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음 한구석이 철렁 내려앉았다. 반복되는 의심에 시누의 목소리는 이미 커져 있었고, 차분히 설명해도 어머님의 의심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숫자와 시간의 흐름을 이해하지 못한 채, 어머님의 생각은 불안과 확신이 뒤섞인 상태였다.

고령자의 치매는 한 개인의 정체성(identity)인 기억을 지울 뿐 아니라 가족 간의 관계까지 흔든다. 설명되지 못한 기억의 공백은 그대로 남고, 그 빈자리는 의심으로 채워진다. 그 의심은 가장 가까운 사람을 향한다. 치매가 진행되면서 이런 양상은 더욱 뚜렷해졌다. "통장에 있던 내 돈이 사라졌다", "배우자가 바람을 피운다", "자식들이 나를 버릴 것이다"와 같은 생각들은 논리나 증거로는 더 이상 설득할 수 없는, 판단 능력이 무너진 상태에서 나타나는 치매의 전형적인 망상 증상들이다.

그전까지 우리는 치매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어머님의 완강한 의지를 존중하며 온 가족이 역할을 나눠 돌봄을 이어왔다. 그러나 더 이상 가족의 인내와 설명만으로는 어머님을 지켜낼 수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결국 장기요양보험을 신청했다. 서류를 준비하고 등급 판정을 받는 과정은 생각보다 복잡하지 않았다.

ⓒ 뉴스1 이은현 디자이너

전 세계적으로 장기요양보험 제도는 고령화 속도만큼이나 큰 격차를 보인다. 독일과 일본처럼 사회보험 방식으로 노인 돌봄을 국가가 책임지는 나라도 있지만, 상당수 국가는 여전히 가족 부양에 의존하거나 민간 보험에 맡기고 있다.

이런 가운데 2008년 시작된 한국의 장기요양보험은 재가서비스로 방문요양, 방문목욕, 방문간호, 주야간보호센터, 복지 용구와 요양시설 급여까지 포괄하며 돌봄을 가족의 헌신이 아니라 사회가 보장해야 할 공적 복지의 영역으로 끌어올렸다. 고령 인구가 급속히 늘고 있지만 공적 돌봄 체계가 아직 미흡한 중국에서 한국의 장기요양보험을 연구 대상으로 삼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우리 제도는 완벽하지는 않지만 초고령사회 한국에서 고령자의 존엄과 자립, 나아가 가족의 삶까지 함께 지키려는 사회복지의 방향성을 분명히 보여준다.

일본은 치매를 개인이나 가족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체가 함께 대응해야 할 과제로 정의해 왔다. 초고령사회에 가장 먼저 진입한 일본은 '인지증'(認知症)이라는 용어를 공식적으로 사용하며 치매에 대한 낙인과 공포를 줄이기 위한 인식 전환부터 시도했다. 치매기본법과 국가 차원의 종합전략을 통해 의료·요양·주거·지역사회 돌봄을 하나의 연속선으로 묶고, 치매 환자가 마지막까지 지역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치매 친화적 사회'를 정책 목표로 삼고 있다.

조기 진단 이후 곧바로 돌봄으로 연결되는 체계, 가족 돌봄자의 희생을 전제로 하지 않는 공공 책임 원칙은 일본 치매 정책의 핵심이다. 그러나 일본에서도 영케어러 문제가 지속되고, 지역사회 요양 병상수가 제한된 상황에서 시설 돌봄이 필요한 고령자들이 재가 돌봄에 의존하는 현실을 보며, 제도와 현장 사이의 간극을 다시금 느끼게 된다.

몇 년 전 일본 학회에서 처음 접했던 '휴머니튜드'(Humanitude™)라는 개념이 이 과정에서 다시 떠올랐다. 돌봄을 '관리'나 '통제'가 아니라 인간의 존엄을 끝까지 지켜내는 관계로 바라보는 철학이다. 1979년 프랑스에서 시작된 이 치매 돌봄 방법은 '보다', '말하다', '만지다', '서다'라는 네 가지 기본 원칙을 통해 환자의 존엄성과 정서적 안정을 우선한다. 눈을 맞추고 말을 건네며 손을 잡는, 지극히 기본적인 행위들이 설득이 통하지 않고 논리가 무너진 인지 저하 고령자에게는 효과적인 소통법이다.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처럼, 우리 모두의 준비된 노후는 가족의 효심에 기대는 일이 아니라 사회가 함께 만들어가야 할 안전망이다.

ⓒ 뉴스1 김초희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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