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이도 안심하고 급식 먹게"…한 부모의 제안, 국가정책 됐다
[식약처 사람들] 국내 첫 희귀질환 어린이 식사안전관리 지침 마련
"단 한 명도 소외 없게"…보호자·교직원 함께 활용하는 첫 공통 기준 제시
- 천선휴 기자
(서울=뉴스1) 천선휴 기자
어린이집이 바뀔 때마다, 전학을 갈 때마다 같은 설명을 반복해야 했다."우리 아이는 이 음식은 먹으면 안 됩니다."
희귀질환 어린이를 둔 부모에게 어린이집과 학교 급식은 늘 걱정의 대상이었다. 아이가 먹을 수 있는 음식과 먹으면 안 되는 음식, 잘못된 식사가 어떤 위험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 보호자가 직접 설명해야 했고, 새로운 교사나 급식 담당자가 바뀔 때마다 같은 이야기를 다시 꺼내야 했다.
이 같은 현실을 바꿔 달라는 한 부모의 제안은 정부 정책으로 이어졌다.
지난해 8월 식품의약품안전처가 개최한 '식의약 정책이음 열린마당'에서 배준호 한국당원병환우회 대표는 "특수식이나 식단관리가 필요한 희귀질환 어린이를 위한 식사관리 지침이 필요하다"며 "학부모가 매번 급식 관계자에게 질환 특성을 설명해야 하는 부담을 덜어줄 수 있는 지원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식약처는 이를 단순 민원이 아닌 정책 과제로 검토했고 최근 국내 최초로 29개 희귀질환을 반영한 '희귀질환 어린이 식사안전관리 지침'을 마련했다. 희귀질환 어린이도 또래 친구들과 함께 안전하게 급식을 받을 수 있도록 국가 차원의 식사안전관리 기준을 처음 마련한 것이다.
희귀질환 어린이는 질환마다 섭취 가능한 음식과 제한해야 하는 음식이 다르다. 특히 어린이는 스스로 식사를 관리하기 어려워 어린이집과 유치원, 학교 급식에서 세심한 관리가 필요하다. 하지만 그동안 현장에는 참고할 수 있는 표준 지침이 사실상 없었다.
급식 관계자는 식사안전 정보를 대부분 보호자에게 의존해야 했고 학부모는 아이가 새로운 시설을 이용할 때마다 질환 특성과 식사관리 방법을 반복해서 설명해야 했다. 교직원 역시 응급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는 부담 속에서 아이를 돌봐야 했다.
식약처는 우선 지난해 당원병과 페닐케톤뇨증, 갈락토오스혈증, 선천성 고인슐린혈증 등 4개 희귀질환을 대상으로 지침을 마련했다. 이후 올해 3월 열린 정책이음 열린마당에서 "다른 희귀질환도 포함해 달라"는 현장 의견이 제기되자 지침 확대 작업에 착수했다.
이번에는 기존 자료를 보완하는 수준이 아니라 처음부터 새롭게 지침을 구축했다. 식약처와 식생활안전관리원은 전국 238개 어린이급식관리지원센터를 통해 지원받는 3만 3000여 개 어린이 급식시설을 전수조사했다. 실제 급식시설을 이용하는 희귀질환 어린이를 최대한 포함할 수 있도록 관리 대상 질환을 선정했고, 윌슨병과 크론병, 중증근무력증, 모야모야병 등을 포함한 29개 희귀질환을 최종 반영했다.
또 의료진과 임상영양사, 희귀질환 환우회, 어린이집연합회, 식생활안전관리원, 급식관리지원센터 등이 수차례 의견을 모으며 현장에서 실제 활용할 수 있는 실천형 지침을 완성했다.
지침에는 희귀질환별 주요 특징과 증상, 제한식품과 대체식품, 식재료 선택 시 제품 표시사항 확인 방법, 식습관 관리, 급식 관계자별 역할과 주의사항 등이 담겼다. 단순히 제한 식품을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고 급식 준비부터 제공, 응급상황 대응까지 현장에서 바로 적용할 수 있도록 구성한 것이 특징이다.
정책 제안이 접수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국내 최초의 희귀질환 어린이 식사안전관리 지침이 마련된 것이다.
처음 정책을 제안했던 배 대표는 "지난해 8월 오유경 처장에게 처음 희귀질환 어린이를 위한 식사지침 마련을 요청했고 이후 4개 질환을 반영한 지침이 만들어진 데 이어 올해는 29개 질환으로 확대되는 과정을 보며 정책 추진 속도에 놀랐다"며 "희귀질환 환아의 아버지로서 한 사람의 목소리에도 귀 기울이고 적극적으로 소통해준 식약처에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이번 지침은 단순히 희귀질환별 식사관리 정보를 정리한 자료집이 아니다. 보호자와 교직원, 영양사 모두가 함께 활용할 수 있는 첫 번째 공통 기준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급식 현장에서도 기대가 크다. 지금까지는 희귀질환 어린이가 입소하면 급식 담당자와 교직원이 보호자의 설명을 토대로 식단을 조정하거나 응급상황에 대비해야 했다면 앞으로는 표준화된 지침을 바탕으로 보다 체계적인 식사관리가 가능해질 것으로 기대한다.
이은숙 평택시어린이집연합회장은 "그동안 어린이집 교직원들은 희귀질환 아이가 입소하면 응급상황이나 식이관리에 대한 부담을 크게 느꼈던 것이 사실"이라며 "명확한 표준 지침이 마련된 만큼 아이들을 더욱 안심하고 세심하게 돌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전국 238개 급식관리지원센터도 이번 지침을 현장에 안착시키는 역할을 맡는다. 식약처는 센터 소속 영양사가 지침을 활용해 어린이집과 유치원 등 급식시설의 식단 관리와 현장 교육을 지원하도록 하고 교육부 등 관계기관과도 공유해 학교 현장까지 활용 범위를 넓힐 계획이다. 이를 통해 희귀질환 어린이를 위한 식사안전관리 체계를 전국으로 확산한다는 구상이다.
지침 개발에 참여한 임혜지 신촌세브란스 어린이병원 교수는 "희귀질환 어린이는 섭취하는 음식이 의학적 응급상황을 유발할 수 있어 정교한 관리가 필요한 분야"라며 "이번 지침이 급식 현장의 사고를 예방하고 환아의 건강한 성장을 돕는 이정표가 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희귀질환 환자단체도 이번 지침을 반겼다. 이은영 한국희귀난치성질환연합회 부회장은 "희귀질환 환아와 부모들은 가정 밖에서 식사할 때마다 늘 큰 불안을 안고 살아왔다"며 "이번 지침은 단순한 정보 제공을 넘어 우리 아이들이 어디에서나 안전하게 보호받는 식사를 위한 출발점이라는 점에서 매우 뜻깊다"고 말했다.
오유경 식약처장은 "희귀질환 어린이 식사안전관리 지침이 희귀질환 어린이도 소외되지 않고 안전한 급식을 제공받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첫걸음이 되기를 바란다"며 "앞으로도 현장과 적극적으로 소통하며 식생활 취약계층을 위한 지원 정책을 지속적으로 확대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sssunhue@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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