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귀질환, 이제 서울까지 가지 않아도 됩니다" [희귀질환]①
임한혁 충남·대전권역 희귀질환 전문기관 단장
"원정 진료 가지 않아도 권역에서 진단-치료-돌봄 완결"
- 조유리 기자
(서울=뉴스1) 조유리 기자
"희귀질환은 병이 드문 만큼, 환자도 드뭅니다. 일반 의료기관은 인력과 장비에 한계가 있어 그만큼 진단은 늦어지고, 치료는 더 멀어집니다."
29일 임한혁 충남·대전권역 희귀질환 전문기관 단장(충남대병원 교수)은 희귀질환자들이 겪는 현실을 이렇게 설명했다. 2025년 국내 희귀질환은 1389개, 산정특례 등록 인원은 45만여명이다. 우리나라 전체 인구 5100만 명 가운데 약 0.9%도 채 못 미친다.
희귀질환은 종류가 다양하지만 각 질환의 환자 수는 매우 적어, 전문가조차 충분한 임상 경험을 쌓기 어렵다. 이로 인해 환자들은 꾀병으로 오해받거나, 오진을 겪는 등 수년간 병원을 전전하다가 뒤늦게 진단을 받는 경우가 흔하다.
이 같은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질병관리청은 지난해 전국 권역별 17개 병원을 희귀질환 전문기관으로 지정했다. 지역에서 거주하는 희귀질환자가 원정 진료를 떠나지 않고도, 권역 내에서 진단부터 치료와 관리를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즉, 지역 내에서 완결된 희귀질환 의료서비스 지원체계를 구축하는 것이다.
전문기관은 진료를 넘어 권역 내 희귀질환자의 유병 현황과 진단 과정, 질환 특성을 체계적으로 파악하기 위한 자료 수집과 통계를 구축한다. 또 유전상담을 위한 전문 클리닉 운영, 병원 내 다학제 진료체계를 제공한다.
진료실 밖의 역할도 크다. 환자와 그 가족을 위한 교육, 자조 모임 등 돌봄 프로그램을 지원하고 원내 사회 공헌 프로그램이나 질병청 의료비 지원 사업 등을 안내 및 연계하는 역할도 수행한다. 아울러 일반인과 의료진을 대상으로 한 인식 개선 활동, 세미나와 심포지엄 등 전문 교육도 매년 이어진다.
임 단장은 "질병청을 중심으로 전국 17개 전문기관이 하나의 유기체처럼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공통 사업과 협력을 통해 국내 희귀질환자와 가족을 위한 삶의 질 개선과 의료 고도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충남대병원은 20여 년간 충남·대전 권역에서 희귀질환 의료의 중심축을 맡고 있다. 지난 2006년 희귀난치성질환센터 시범사업에 선정된 이후, 2007년부터 2018년까지 지역 거점기관 역할을 수행했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2019년부터는 전국 12개 권역별 거점센터 사업에 참여하며 경험을 축적했고, 지난해 전문기관으로 전환해 안정적으로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시작은 쉽지 않았다. 초기에는 병원 안팎에서 희귀질환 센터에 대한 인식이 낮았고, 환자도 적었다. 질환 특성상 병원 수익과도 직결되지 않아 지원은 제한적이었다. 임 단장은 "의료진의 경험과 역량도 충분하지 않았다. 그래서 가장 먼저 선택한 것이 의료진 교육이었다"며 국내외 심포지엄과 자체 콘퍼런스를 꾸준히 열며 희귀질환에 대한 의학적 토대를 다졌다고 전했다.
동시에 지역 병원 간 네트워크를 구축해 환자 조기 발견과 의뢰 체계를 만들었고, 병원 차원의 투자로 유전체 진단 장비와 전문 인력도 확충했다. 그 결과, 10여 년이 흐른 지금은 희귀질환자가 지역에서도 안심하고 진료받을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환자가 늘면서 고민도 깊어졌다. 진단 이후의 삶이다. 충남대병원은 환자와 가족의 삶의 질을 같이 고민하며 환자 가족 세미나, 자조모임, 희귀질환 캠프 등 진료실 밖 프로그램을 하나둘 늘려갔다. 이 활동들은 자연스럽게 환자 간 네트워크로 이어졌다.
이후 병원의 소아완화의료센터와 협력해 전문가와 함께하는 미술치료, 작업치료, 전신 그림 활동 등 신체·정신·영적 돌봄 프로그램을 체계화했다. 만족도는 매우 높아, 현재까지 지속 운영 중이다.
또 하나의 고무적인 변화는 올해부터 시작된 희귀질환 국가등록 사업이다. 정부 차원에서 희귀질환자를 등록해 관리하는 사업으로 환자의 진단과 치료 경과를 체계적으로 추적·관리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되기 시작했다. 다만 임 단장은 "여전히 예산 증액, 전담 인력 확충, 인력의 신분 보장 등은 해결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고 했다.
현재 충남대병원에서 올해 상반기에만 신규 희귀질환 환자 728명이 내원했다. 이 중 130여 명은 유전상담을, 120여 명은 유전자 검사를 지원받았다. 서울에서 진단받은 뒤, 장기 관리를 위해 다시 충남대병원으로 의뢰되는 사례도 늘고 있다. 임 단장은 "시간을 충분히 들여 진료하는 만큼 환자들의 만족도가 높다"고 답했다.
실제로, 최근에는 어릴 적부터 운동발달지연이 있고, 지적장애가 진행 중인 10대 후반 환자가 예약을 통해 내원했다가 희귀질환으로 확인 받고, 이후 적절한 치료를 통해 목숨을 살릴 수 있었다. 환자는 몇 년 동안 지역의 1, 2차 병원과 서울의 병원에서 근조직 검사와 유전자검사까지 했으나, 확진을 받지 못하고 추적관찰만 하다가 충남대병원으로 오게 됐다.
희귀질환클리닉에서는 그간의 검사와 다른 유전자검사를 실시했고, 찾아내기 어려운 유전자를 새롭게 발견하면서 환자는 다논병으로 최종 확인받았다. 해당 질환은 심근병증으로 인해 사망할 수 있는 질환이다. 실제, 희귀질환으로 확인이 된 후 환자는 부정맥이 급격히 심해지고 심장박동이 어려워 심박동기를 삽입했다. 1년이 지난 시점에 심부전이 지속돼 중환자실에서 버티던 중 극적으로 심장이식을 받게 되며 회복하게 됐다.
이재명 정부 들어 정부의 희귀질환에 대한 관심은 분명해지고 있다. 이 대통령은 성탄절을 하루 앞둔 지난 24일 희귀질환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환자와 그 가족들을 만나 정부 지원 확대 방안을 고민해 보겠다고 밝혔다. 의료 현장의 어려움과 환자들의 삶을 직접 듣겠다는 메시지로 읽힌다.
임 단장도 환자의 상태를 계속해서 듣고 살피는 '지속 관리'가 중요하다고 했다. 그는 "희귀질환은 대부분 완치가 어렵기 때문에 환자와 가족이 거주지에서 지속해서 치료와 상담, 정서적 지지를 받는 게 매우 필요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역량이 강화된 권역 희귀질환 전문기관의 활동과 전국 네트워크의 연결은 의료진 간 다양한 경험을 공유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빠른 의뢰, 회송을 통해 환자와 가족이 서울까지 가지 않아도 집 가까운 곳에서 정확하고 빠른 진단과 치료, 상담과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안식처를 제공한다"고 전문기관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올해를 시작으로 충남대병원은 충북대병원, 세종충남대병원과 함께 희귀질환 연합 심포지엄을 매년 개최할 예정이다. 이를 통해 충청권 전문기관의 역량을 고르게 끌어올리고, 진단을 넘어 치료를 선도하는 중추 기관으로 도약한다는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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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국내 인구의 약 0.9%를 차지하는 희귀질환자는 '희귀하다'는 이름과 달리 우리 주변에 존재한다. 희귀질환은 종류가 다양하지만 각 질환별 환자 수는 매우 적어, 환자와 의료진 모두 진단과 치료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현실이다. 이에 정부는 희귀질환자의 조기 진단과 치료 접근성을 높이고, 삶의 질을 개선하기 위한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뉴스1은 질병관리청과 함께 희귀질환자와 그 가족이 처한 현실과 이들을 둘러싼 제도적 노력과 과제를 집중 조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