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포 '우체국'이 암을 키운다…골지체 응축, 위암 악성도 높이는 핵심 기전

골지체 응축된 위암세포, YAP1 3배 활성…세포 구조로 본 암의 본질
김지윤 교수 "항암제 작동하지 않는 환자에게 새 대안될 것"

위암 세포 내 골지체의 응축된 구조 변형이 암 촉진 인자인 YAP1을 활성화시켜 암의 악성화를 유도하는 과정을 설명하는 모식도(가톨릭대학교 가톨릭중앙의료원 제공)

(서울=뉴스1) 김규빈 기자 = 국내 연구진이 세포 속 단백질 운송기관인 '골지체(Golgi apparatus)'가 단순한 세포소기관이 아니라 위암의 공격성을 결정짓는 주체라는 밝혀냈다.

12일 가톨릭중앙의료원에 따르면 김지윤 가톨릭대학교 약리학교실 교수팀은 골지체의 구조가 뭉치는 '응축(condensation)' 현상이 암을 촉진하는 단백질인 YAP1(Yes-associated protein 1)의 활동을 자극해 위암의 성장과 전이를 빠르게 만든다는 사실을 규명했다.

이번 연구는 세포 구조 변화 자체가 암의 생물학적 성질을 바꾼다는 점을 입증한 사례로, 단백질 억제 중심의 기존 항암제 개발 방식을 넘어 '세포 구조를 제어하는 항암 전략'이라는 새로운 접근을 제시했다.

연구진은 사람의 위암 세포주(SNU1967, MKN74, SNU484 등)와 정상 위 상피세포(HFE145, GES1)를 비교 분석했다. 정상 세포의 골지체는 세포 안에서 넓게 펼쳐진 형태로 분포하지만, 위암 세포에서는 오히려 골지체가 한곳에 뭉쳐 응축된 형태로 변해 있었다. 골지체는 단백질을 만들어 세포의 다른 기관으로 '배달'하는 일종의 물류센터 역할을 하는데, 구조가 응축되면 단백질 운반 속도와 방향이 바뀌어 세포 내 신호 전달 체계에 변화를 준다.

연구진에 따르면 골지체가 응축된 위암 세포는 단백질 이동 통로 역할을 하는 미세소관(microtubule)의 형성이 활발하게 일어나, 암의 성장 신호를 전달하는 YAP1 단백질이 훨씬 빠른 속도로 세포핵으로 이동했다.

YAP1은 평소에는 세포질 안에서 대기하다가, 핵 안으로 들어가면 세포 분열과 이동을 촉진하는 '성장 스위치'로 작용한다. 정상 세포에서는 이 이동이 제한되지만, 위암 세포에서는 골지체의 구조가 바뀌면서 YAP1의 핵 이동이 약 2.4배 늘어났다. 그 결과 암세포는 분열 속도와 이동 능력이 각각 1.9배, 45% 증가하며 악성화가 촉진됐다.

연구진은 이러한 과정을 골지체 응축 → 미세소관 형성 증가 → YAP1 핵 이동 가속 → 암세포 성장 촉진 이라는 새로운 발암 경로로 제시했다. 이는 단순히 유전자 변이 때문이 아니라, 세포 구조의 물리적 변화가 암의 성질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연구진은 실제 위암 환자 20명의 병리조직을 분석해 이 현상이 인체에서도 동일하게 일어나는지를 확인했다. 골지체의 면적이 작을수록 핵 안에서 활발히 움직이는 YAP1 단백질이 많았고, 세포의 증식 속도 역시 빨랐다.

즉 골지체 응축이 심할수록 암이 빠르게 성장하고, 종양의 침습성도 높아졌다. 특히 예후가 나쁜 위암 아형인 반지세포암(Signet Ring Cell Carcinoma) 환자군에서 이 현상이 두드러졌다. 반지세포암은 점액을 많이 분비해 치료가 어려운 유형인데, 이 환자들의 세포에서는 골지체 응축 비율이 일반 위암보다 약 2배 높았고 YAP1 단백질의 활성도도 3배 이상이었다.

연구팀은 이 결과를 바탕으로 골지체의 형태 자체가 위암의 악성도를 가늠할 수 있는 '새로운 진단 지표'로 쓰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세포 구조를 현미경으로 관찰해 위암의 공격성을 예측할 수 있는 만큼, 향후 병리 분석의 새로운 기준이 될 가능성이 크다.

연구진은 구조 조절을 통한 치료 가능성도 검증했다. 골지체 응축을 완화시키는 항생제 계열 약물인 모넨신(monensin)을 위암 생쥐 모델에 투여하자, 종양 성장률이 40% 줄고 종양 무게가 절반 가까이 감소했다. 세포 분열을 나타내는 Ki67 단백질의 발현도 감소했고, 핵 안으로 들어가는 YAP1의 양도 크게 줄었다.

반대로 골지체 응축을 유도하는 약물(디곡신, 디지톡시게닌 등)을 투여한 세포에서는 종양 증식과 침습이 각각 1.8배, 2.1배 늘었다. 이 결과는 골지체의 구조를 조절하는 것만으로 암의 성장 속도를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김지윤 교수는 "골지체의 응축은 단순한 형태 변화가 아니라, 암세포의 공간 구조가 신호전달 네트워크를 재구성하는 과정"이라며 "세포 구조 조절이라는 새로운 항암 전략이 가능함을 보여준 연구"라고 말했다.

연구진은 골지체 응축형 암을 별도의 종양 아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응축형 세포는 비응축형보다 YAP1 활성이 2.8배, 혈관 침습률이 1.5배 높았다. 이 기준이 병리 진단에 반영되면 위암 예후 예측 정밀도가 한층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김 교수팀은 현재 간암(HepG2), 폐암(A549), 대장암(HCT116) 세포에서도 '골지체–YAP1 축'이 유사하게 작동하는지를 검증하고 있다. 초기 데이터에 따르면 간암과 폐암 세포의 골지체 응축도는 위암 수준과 비슷했으며, YAP1의 핵 이동률도 2배 이상 높았다. 김 교수는 "공간 구조 기반 항암 전략은 암세포의 형태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접근으로, 기존 항암제가 작동하지 않는 환자들에게 새로운 대안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이번 연구결과는 미국암학회(AACR) 공식 학술지 Cancer Research 최신호에 게재됐다.

rnkim@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