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무대 오른 美-이란…축구장 위로 번진 전쟁[최종일의 월드 뷰]
- 최종일 선임기자

(서울=뉴스1) 최종일 선임기자 = 축구는 흔히 '총성 없는 전쟁'으로 불린다. 국가 간 자존심과 역사, 정치적 감정이 한 경기 안에서 정면으로 충돌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제 군사적 충돌 상태에 있는 국가들이 맞붙는 경우라면, 경기장의 긴장감과 전 세계의 시선은 더욱 증폭될 수밖에 없다. 세계 축구 최고의 무대에서 이런 장면이 현실이 될 가능성이 점차 커지고 있다.
현지시간으로 오는 11일 막을 올리는 2026 국제축구연맹(FIFA) 북중미 월드컵은 전례 없는 묘한 긴장감 속에 치러진다. 대회 사상 최초로 개최국이 자신과 실제 전쟁 중인 적대국과 동시에 본선 무대에 서게 됐기 때문이다. 미국과 이란은 현재 전쟁 상태에 놓인 가운데, 양국 대표팀이 나란히 본선에 진출했고, 또 맞대결 가능성이 높아 장외 불꽃이 튀고 있다.
유사한 사례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82년 월드컵 당시 아르헨티나는 영국과 포클랜드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엔 제3국인 스페인에서 대회가 열렸고, 실제 경기장 안에서의 충돌은 성사되지 않았다. 반면 이번에는 전쟁의 당사국인 미국이 대회의 안방마님이라는 점에서 무게감이 전혀 다르다.
앞서 이란 대표팀은 지난 3월 아시아 예선에서 우즈베키스탄과 2-2로 비기며 본선 진출을 확정했다. 올해 2월 말 전쟁 발발 이후 국제 이동 제한과 외교적 긴장이 겹치며 참가를 둘러싼 우려도 제기됐지만, 이란은 결국 월드컵 참가를 결정했다. 다만 보안 및 물류상의 이유로 대표팀 베이스캠프는 미국이 아닌 멕시코 티후아나에 둥지를 틀었다.
이란은 뉴질랜드, 벨기에, 이집트와 함께 G조에 편성됐으며, 조별리그 3경기를 모두 미국 내에서 치르게 된다. 이란 축구협회는 자국 대표팀이 1차전에선 경기 하루 전에, 2·3차전엔 이틀 전에 미국으로 이동할 예정이라고 발표했다. 선수단은 가까스로 미국 입국 비자를 받아냈지만, 관리 및 행정직 등 지원 인력 15명은 발급이 거부당해 시작부터 비자 갈등의 잡음이 일었다.
미국은 D조에 속해 파라과이와 호주, 튀르키예와 경쟁한다. 이에 따라 조별리그 단계에서는 양국의 직접 대결이 성사되지 않으며, 두 팀이 만날 수 있는 경로는 토너먼트 이후 단계로 제한된다.
가장 현실적인 시나리오는 32강전 맞대결이다. 미국과 이란이 각자 속한 조에서 모두 조 2위로 조별리그를 마치면 텍사스주 알링턴에서 맞붙게 된다. 두 팀이 모두 조 1위로 진출해 32강을 나란히 통과한다면 16강전 맞대결도 성사된다. 8강전에서의 만남은 수학적으로는 가능하지만, 훨씬 더 복잡한 경로를 거쳐야 한다.
미국과 이란은 축구로 세 차례 맞붙은 바 있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는 이란이 2-1로 승리했다. 이란 역사상 월드컵 첫 승리였다. 이어 2000년 친선경기에서는 1-1 무승부를 기록했다. 가장 최근인 2022년 카타르 월드컵에서는 미국이 1-0으로 승리했다.
양국 모두 조별리그 통과 가능성은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피파 순위 16위 미국은 개최국 이점과 젊은 '황금세대'를 앞세운 상승세이고, 21위 이란은 조직력과 수비 안정성을 기반으로 한 전통 강호다. 외신과 분석기관들은 두 팀 모두 32강 진출 확률을 70% 이상으로 보고 있으며, 이에 실제 맞대결 가능성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과거 1998년 리옹 경기는 특히 '월드컵 역사상 가장 정치적인 경기'로 평가된다. 양국 관계는 1953년 미국·영국의 이란 쿠데타 개입으로 시작된 갈등에서 출발해, 1979년 이란 혁명과 미국대사관 인질 사건으로 급격히 악화했다. 이후 1988년 민항기 격추 사건까지 이어지며 적대 관계가 고착됐다. 1990년대 들어 이란에서 개혁 성향의 모하마드 하타미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일부 관계 개선 시도가 있었지만, 기본적인 불신은 여전했다.
양 팀의 선수들과 코치진은 경기의 정치적 색채를 덜어내려 노력했으나, 경기 전 행사에서 이란 선수단이 미국 선수들에게 다가가는 것을 거부하고, 경기장 내에선 반(反)이란 정권 시위가 일어나는 등 긴장감은 높았다. 이러한 긴장감과 테러에 대한 우려로 인해 수많은 경찰 인력이 배치되었으나, 우려와 달리 경기 자체는 평화롭게 진행됐다.
특히 이란 선수들은 경기 시작 직전에 평화의 상징으로 미국 선수들에게 백장미를, 미국 선수들은 미국축구연맹(USSF) 펜던트를 건넸다. 이후 양 팀 선수들은 이례적으로 한데 모여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이에 피파는 그해 두 팀 모두에게 '페어플레이상'을 수여했다.
당시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월드컵은 출신지나 피부색, 종교가 아닌 기량과 실력으로만 평가받는 무대"라며 "이 경기가 양국의 소원한 관계를 청산하는 발걸음이 되기를 바란다"는 영상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이번 월드컵에선 그때와 같은 화해를 위한 제스처는 보기 쉽지 않을 것 같다. 현재 미국·이스라엘과 이란은 올해 2월 28일 발발한 전쟁 이후 100일 넘게 군사적 긴장을 이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양측은 미사일, 전투기, 드론, 자폭 보트, 기뢰 등 다양한 현대전 수단을 동원하며 중동 전역에서 맞붙었으며, 전선은 현재 교착 상태에 빠져 있다. 협상이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산발적인 교전이 이어지며 휴전은 불안정한 상황이다.
그런데도 스포츠의 힘에 실낱같은 희망을 걸어보게 된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 안방에서 이란을 맞이하게 된 미국과, 온갖 제약을 뚫고 날아온 이란 선수단이 그라운드 위에서 인류애의 악수를 나눌 수 있다면, 축구 경기는 현실의 총성을 멈추게 할 외교적 마중물이 될 수 있다.
냉혹한 국제정치 현실 속에서 이러한 낙관론을 펼치는 전문가는 그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예측 불가능한 행보를 보이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돌연 극적인 화해의 메시지를 던지며 국면 전환을 시도하는 시나리오를 공상의 영역에만 묶어두고 싶진 않다. '공은 둥글다'는 말은 꼭 경기 결과에만 해당하는 말은 아닐 것이다.
allday33@news1.kr
Copyright ⓒ 뉴스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이용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