엡스타인 '성매매 리스크'에서 '비리·부패' 뇌관으로…美·유럽 들썩
국가 기밀 유출한 英 장관·왕자…줄줄이 사퇴·경찰 수사 착수
논란 일파만파…사면 압박 英총리, 왕실은 공개 사과
- 양은하 기자
(서울=뉴스1) 양은하 기자 = 억만장자 성범죄자 제프리 엡스타인 스캔들이 미국을 넘어 유럽의 정·재개 고위층까지 뒤흔들고 있다. 그의 추악한 성범죄에 가담하지 않았다며 친분을 부인해 왔던 유력 인사들은 취업 청탁과 로비, 국가 내부 문건 유출 정황을 보여주는 문건 앞에서 고개를 떨구고 있다. 각국에서 부패 혐의로 수사에 착수하면서 그와의 교류는 이제 단순히 '성범죄 스캔들'을 넘어 고위층의 비리·부패 의혹의 뇌관으로 확산하는 양상이다.
최근 미국 국무부는 300만건에 달하는 엡스타인 수사 문건을 추가 공개했다. 문건에는 헤지펀드 매니저 출신의 억만장자 엡스타인이 미성년자 성매매·인신매매 혐의로 체포돼 지난 2019년 수감 중 사망하기까지 수십년간 부유층 및 권력층과의 광범위한 교류를 유지해 온 정황이 담겼다.
특이 고위 공직자들이 지위와 권력을 이용해 국가 기밀 등의 정보와 출처나 이유가 명확하지 않은 거액을 주고받은 듯한 정황이 다수 공개되면서 각국에 충격을 더하고 있다.
가장 논란이 된 인물은 피터 맨덜슨 전 영국 산업장관이다. 맨덜슨은 이미 지난해 엡스타인과의 친분이 드러나 주미 대사에서 경질됐다.
이번 문건에서 그는 산업장관 재직 시절 고든 브라운 정부의 금융위기 대응 경제정책안을 엡스타인에게 유출한 것으로 의심받고 있다. 또 엡스타인과 7만 5000달러에 달하는 금융 거래도 한 것으로 나타나 경찰 수사까지 받게 됐다.
그는 의혹은 부인하면서도 논란이 커지자 노동당에 부담을 주지 않겠다며 탈당하고, 상원의원에서도 사임했다.
고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차남인 앤드루 마운트배튼 윈저도 다시 논란의 가운데에 섰다. 이미 성추문으로 왕자 칭호와 모든 훈작을 박탈당한 그는 이번 문건에서 지난 2010년 홍콩, 베트남, 싱가포르 공식 방문 보고서를 엡스타인과 공유한 사실이 공개됐다. 또 아프가니스탄 재건 투자 기회에 관한 기밀 보고서를 보낸 의심도 받고 있다. 앤드루는 2001~2011년 영국 무역 특사를 지냈다. 영국 경찰은 앤드루에 대해 공직상 비위 혐의를 조사하고 있다.
프랑스의 자크 랑 전 문화장관은 엡스타인과 후폭풍으로 공공 연구 기관인 아랍세계연구소 회장직을 내려놨다. 그도 엡스타인 생전 깊은 관계를 맺어온 인사 중 한명이다. 최근 공개된 문건에 그의 이름이 무려 673차례 등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그의 딸이자 영화제작자인 딸 카롤린은 미국령 버진아일랜드에 문화·예술 사업 목적의 회사를 엡스타인과 함께 설립했다. 그녀는 엡스타인의 유언장에도 등장하는데 500만 달러를 받는다고 적혀있다. 프랑스 국가금융검찰은 랑 전 장관이 딸과 함께 탈세, 자금 세탁 등을 위한 금융거래를 한 것으로 보고 조사에 착수했다.
노르웨이도 엡스타인 문건으로 직격탄을 맞았다.
요르단·이라크 주재 노르웨이 대사였던 모나 율(66)이 그의 남편 테르예 로드-라르센(78)과 엡스타인 사이 금융 거래가 폭로되면서 사임했다.
또 엡스타인 유언장에 이들 부부의 자녀들에게 각각 500만 달러의 재산을 남긴 사실이 드러났다. 경찰은 율의 직책과 관련해 특혜를 받은 것이 있는지 가중 부패 혐의로 수사를 개시하고 주거지 등에 대한 압수수색을 실시했다.
엡스타인이 유죄 판결을 받은 이후에도 그와 교류해 온 토르비에른 야글란 전 노르웨이 총리는 엡스타인 관련 '중대 부패' 혐의로 입건됐다. 노르웨이 경찰은 그가 부패 행위를 저지른 혐의를 포착하고 이달 초 그가 유럽평의회 사무총장 재직 시절(2009~2019년)에 대한 외교적 면책특권 박탈을 요청해 받아냈다.
이외에 뵈르게 브렌데 세계경제포럼(WEF) 총재(전 외무장관)도 엡스타인과 연루 의혹으로 조사를 받고 있다.
개인 범죄로 여겨지는 성착취와 달리 정·재계의 공무상 부정행위 가능성이 제기된 이번 사태는 단순히 당사자들의 사임에서 그치지 않고 있다.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는 맨덜슨 때문에 사임 위기에 놓였다. 그는 엡스타인과의 관계를 알면서도 맨덜슨을 주미 대사에 중용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스타머 총리의 최측근인 모건 맥스위니 총리 비서실장은 이번 사태의 책임을 지겠다며 사임했다. 그는 맨덜슨을 주미 대사로 추천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또 팀 앨런 총리실 공보국장도 새로운 팀이 필요하다며 사임했다.
영국과 노르웨이 등 유럽 각국 왕실도 잇따라 사과하며 진화에 나섰다. 영국의 찰스 3세 국왕과 윌리엄 왕세자가 유감을 표시했고, 엡스타인과 직접적으로 교류한 정황이 드러난 노르웨이 왕세자빈은 직접 공식 사과를 했다.
엡스타인 여파는 미국에도 이어지고 있다.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장관은 엡스타인과 알려진 것보다 관계가 더 깊었던 것으로 드러나면서 사임 압박을 받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번 사안이 단순한 성추문을 넘어 권력과 돈을 가진 사람들 사이의 보이지 않는 인맥 구조를 드러내고 있다고 말한다. 성착취는 이들과의 교류에 있어 하나의 연결고리였을 뿐 그 이면에는 인맥을 활용한 돈과 정보 거래로 이익을 챙겨온 구조가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뉴욕타임스(NYT)는 "지금까지 엡스타인 관련 문서로 촉발된 가장 주목받는 조사가 10대 소녀들을 착취한 그의 행위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는 점은 매우 이례적"이라고 논평했다.
yeh25@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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