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 "쿠팡은 미국 기업입니까?"

류정민 특파원 ⓒ News1
류정민 특파원 ⓒ News1

(워싱턴=뉴스1) 류정민 특파원 = "쿠팡은 미국 기업입니까?"

쿠팡의 개인정보 유출 사건이 기업의 국적 논란으로까지 번지면서, 기자는 10년 전 롯데그룹의 경영권 분쟁이 떠올랐다.

당시 롯데에 던져진 수많은 질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하나는, 신동빈 회장의 귀국길 회견에서 한 기자가 물은 '롯데는 일본 기업입니까'이다.

신 회장은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한국 기업입니다"라고 답했고, 곧바로 "95%의 매출이 우리나라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라고 강조했다.

롯데가 일본계 자본 논란에 휩싸이자 이를 잠재우려는 의지를 담은 발언이었다. 지배구조야 어떻든 간에, 한국에서 성장했고, 매출 대부분이 한국에서 발생하고 있으니 응당 한국 기업이라는 의미였다.

미국 국적인 김범석 쿠팡Inc 이사회 의장은 미국에 설립하고 상장한 모회사(쿠팡Inc)를 통해 쿠팡에 대한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번에 터진 3370만 명의 개인정보유출 사고는 그 피해 규모도 규모지만 다른 비슷한 경우와는 달리 국내의 시선이 상대적으로 곱지 않은 데에는 이런 지배구조도 한 몫 하고 있을 것이다.

그나마 '쿠팡은 미국 기업이냐'는 질문에는 "한국에서 성장했고 매출 대부분이 한국에서 발생하고 있으니 그래도 한국 기업 아니겠느냐"는 전향적인 대답을 내놓을 기회를 주려는 심리도 깔려 있다.

그러나 쿠팡의 그간의 행적들이 소개될수록 애정이 남아 있는 비판이 설 자리가 줄어든다. 미국에서 벌여 온 로비만 해도 그렇다.

쿠팡은 조 바이든 행정부 마지막 해인 2024년에 미국에서 삼성전자, SK, 한화, 현대차에 이어 5번째로 많은 387만 달러를 로비 비용으로 썼다. 2023년 국내에서 온라인 플랫폼의 시장 지배력과 불공정 행위를 막기 위한 법률 제정이 본격 논의된 직후다.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 들어서는 3분기까지 251만 5000달러를 로비 비용으로 쓴 것으로 보고했는데, 이는 재계 4위인 LG(249만 달러)보다도 많다. 쿠팡은 미 정·관계 로비를 더욱 강화하기 위해 최근 워싱턴DC 사무소도 새로 개설했다.

삼성, SK, 현대차, LG, 한화 등 한국의 대표 기업들이 미국에서 로비를 하는 이유는 주로 반도체, 자동차, 배터리, 태양광 등 주력 사업의 미국 투자와 관련, 세제나 정책적인 혜택을 얻어내기 위해서다.

반면 쿠팡은 주로 한국에서 유통업을 영위하는 전자상거래 기업이다. 쿠팡이 밝힌 로비 목적을 보면 미국 제품의 한국 등 아시아 수출을 촉진하는 플랫폼으로 정관계에 어필하는 모습이다. 이는 쿠팡의 영업 현실과는 괴리가 있다.

때맞춰 미국 정·관계에서는 한국의 '온라인 플랫폼 공정화법'에 대응하는 구체적인 움직임들이 나온다. 캐럴 밀러(공화·웨스트버지니아) 미 하원의원은 '한미 디지털무역집행법'을 2024년에 이어 올해에도 재발의했다.

특히 이번 이재명 정부와 트럼프 행정부 간 관세 협상에 있어 한국 공정위의 온라인 플랫폼법 입법 추진이 대표적인 디지털 비관세 무역 장벽으로 제기됐고, 한국 측에 상당한 부담을 준 것이 사실이다.

하원 세입위원회 의원들은 제이미슨 그리어 미무역대표부(USTR) 대표를 비롯해 스콧 베선트 재무장관, 하워드 러트닉 상무장관에 한국의 디지털 무역 장벽 해결을 촉구하는 서한을 보냈고, 협상을 위해 방미한 한국의 통상교섭본부장을 직접 만나 압박했다.

한국 정책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미국 정관계 로비는 경영 전략으로서 매우 효율적이고 훌륭하다. 미국 기업의 미국 내 활동도 자연스럽다. 하지만 가장 현명한 선택조차도 가끔은 뜻하지 않은 함정에 빠진다.

만약 김범석 의장이 사건 초기에 신속하고 진정성 있게 사과하고 책임지는 태도를 보였다면 사태의 전개가 어땠을까. 미국 기업이냐, 한국 기업이냐에 따라 죄의 경중이 달라질 일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불필요한 논란에 휩싸이는 일은 줄었을지 모른다. 10년 전 신동빈 회장이 롯데가 한국 기업이라며 밝혔던 매우 간결한 이유에서부터 실마리를 찾아갔으면 한다.

ryupd01@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