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칸드림 사망선고 내린 트럼프 독일계 이민 2세[시나쿨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9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DC 백악관 집무실에서 열린 골드카드 비자 행정명령 및 전문직 고용 비자(H-1B) 비용 부과 포고문 서명 행사에서 문서를 들어보이고 있다. 2025.09.19. ⓒ 로이터=뉴스1 ⓒ News1 류정민 특파원

(서울=뉴스1) 박형기 기자 =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기술 인력에 발급하는 ‘H-1B’ 비자 수수료를 100배 인상함에 따라 ‘아메리칸드림’에 사망선고를 내렸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H-1B 비자는 과학·기술·공학·수학(STEM) 분야 전문직에 주어지며 기본 3년 체류에 연장이 가능하고, 영주권도 신청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아메리칸드림’의 티켓으로 여겨져 왔다.

전 세계 수많은 인재가 이 비자로 미국에 입국해, IT 업계에서 경험을 쌓은 뒤 스타트업(새싹 기업)을 창업, 굴지의 글로벌 기업으로 키웠다.

그런데 트럼프 행정부는 지난 19일 H-1B 비자 발급 수수료를 10만 달러(약 1.4억)로 올린다고 발표했다. 이는 이전의 1000달러에서 100배 인상된 것이다.

이에 따라 해외 기술 인력의 미국 입국이 더욱 어려워질 전망이다.

일단 이번 조치로 제2의 일론 머스크가 탄생하기는 힘들게 됐다. 머스크는 처음 학생으로 미국에 도착한 뒤 H-1B 비자를 발급받아 IT 업계에서 일을 시작했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 ⓒ 로이터=뉴스1 ⓒ News1 김경민 기자

IT 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그는 이후 테슬라, 스페이스X 등을 창업, 세계적 기업으로 키워 냈다.

그는 지난해 12월 X(구 트위터)에 올린 글에서 "H-1B 비자가 없었다면 내가 스페이스X, 테슬라 등 미국을 강하게 만든 기업을 건설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H-1B 비자가 외국의 두뇌를 유치, 미국의 IT 산업을 번성하게 했다"고 강조했다.

머스크뿐만 아니라 최근 미국 IT 업계에서 외국 출신 CEO가 유난히 돋보이고 있다.

원래 미국의 IT 업계의 상징은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MS) 창업자, 스티브 잡스 애플 창업자였다. 그런데 잡스는 췌장암으로 사망했고, 게이츠는 현역에서 은퇴한 뒤 자선사업에 집중하고 있다.

빌 게이츠 게이츠재단 이사장이 8월 22일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오찬 미팅을 하기 위해 삼성전자 서초 사옥에 들어서고 있다. (삼성전자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2025.8.22/뉴스1

이에 따라 현재 미국 IT 업계의 상징은 젠슨 황 엔비디아 CEO와 머스크 테슬라 CEO다. 공교롭게도 둘 다 이민자다. 머스크는 남아공 출신이고, 젠슨 황은 대만 출신이다.

엔비디아의 경쟁업체 AMD의 CEO도 대만 출신 리사 수다. 이뿐 아니라 미국 최대 반도체 업체 인텔의 립부 탄 CEO도 말레이시아 출신이다.

인텔 최고경영자(CEO) 립부 탄. ⓒ 로이터=뉴스1 ⓒ News1 박형기 기자

더욱 놀라운 것은 미국 7대 기술 기업을 이르는 ‘매그니피센트 세븐’(M-7) 중 무려 4개 기업 CEO가 외국 출신이라는 점이다.

M-7은 엔비디아, MS, 애플, 알파벳, 아마존, 메타, 테슬라다. 일단 젠슨 황이 대만 출신이다. 사티아 나델라 MS CEO, 순다르 피차이 알파벳 CEO가 인도 출신이다. 머스크는 남아공 출신이다.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 2025.07.23. ⓒ AFP=뉴스1 ⓒ News1 권영미 기자

7대 기업 중 4대 기업 CEO가 외국계 미국인일 정도로 실리콘밸리는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 인재의 요람이다.

이러한 상황임에도 트럼프는 아메리칸드림의 지름길로 여겨졌던 H-1B 비자 프로그램을 사실상 폐지했다.

그는 성명에서 “H-1B 비자는 일시적으로 고숙련 업무를 수행하라고 마련됐지만, 미국 노동자를 저임금·저숙련 일자리로 몰아내는 데 악용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IT 기업의 번성을 위해 비자 프로그램을 확대해도 시원치 않을 판에 '미국 우선'이라는 국수주의에 갇혀 정반대의 정책을 쓴 것이다.

그런데 재밌는 사실은 정작 트럼프 자신도 이민의 후손이라는 점이다. 부친인 프리드릭 트럼프는 1869년 독일 칼슈타트에서 태어났다. 8살 때 아버지가 폐렴으로 사망하면서 생계가 어려워지자 16세인 1886년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며 미국으로 건너갔다.

프리드릭 트럼프 - 위키피디아 갈무리

그는 1950년대 뉴욕 브루클린에서 아파트와 연립주택 사업으로 성공해 부동산 재벌이 됐다. 그는 차남인 도널드에게 자신의 부동산 제국을 물려주었다.

트럼프도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며 미국에 왔던 독일 이민의 2세인 것이다. 그런 그가 아메리칸드림을 짓밟았다.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 한다’는 말은 이럴 때 쓰라는 표현일 터이다.

sinopark@news1.kr